“이럴 거면 차라리 포기”···PTSD 소방관이 공상 신청 앞에서 멈춘 이유

이삼섭 기자
업데이트 2026.01.30. 10:36
<하>불길 밖 죽음: 소방관 트라우마 국가 책임을
공상 신청 동행해보니 십수개 서류, 오래된 의무기록
국가가 각종 데이터 보유에도 개인에 '입증' 떠넘겨
'특수 사건'만 인정하는 규정…근무 환경 외면 지적
최근 광주 한 카페에서 만난 전남소방 소속 A소방관은 “10여년 전 정신병원 진료 기록부터 수십여 가지 서류까지 준비할 게 너무 많아, 공상 신청을 포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을 진단받은 뒤 공상 신청을 고민하는 중이었다.최류빈기자 rubi@mdilbo.com

“이럴거면 차라리 신청을 포기하는 게 낫겠네요.”

전남소방 소속 A소방관은 눈 앞에 펼쳐진 서류들에 탄식을 내뱉었다.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은 A소방관은 공무상 재해(공상)를 신청하기 위해 뗀 첫걸음부터 숨 막혀오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순직·공상 확인서와 공상자 입원비 지원 신청서, 병원의무기록지에 더해 정신적 재해를 증명하기 위한 정신질환명이 명시된 진단서, 상병발생경위서 등 십여 개가 넘는 서류는 마치 벽처럼 “넘어오지 말라” 말하는 듯했다.

◆첫 걸음부터 서류의 벽에 한숨

최근 광주 모처에서 A소방관을 만나 노무사 자문을 받아 공상 신청을 함께 진행해봤다. 그가 공상 신청에 나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신적 질환을 가진 많은 소방관들이 공상 신청 단계에서부터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절차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기본적인 건강보험·요양급여 내역을 발급받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난관은 ‘병원의무기록지’였다.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노무사(또는 공단)를 통한 대리 발급마저 불가능했다. 재해자 본인(본인 사망 시 유족)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 A 소방관은 “수십 년 전 내원했던 병원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현재 운영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여러 병원에 전화를 걸어 과거 기록을 확인하는 일 자체가 오래 묻어둔 상처와 병력을 다시 들추는 것 같아 괴롭다는 말도 했다.

공상 신청서에 기재해야 하는 내용도 부담이다. 공상 신청서에는 발병 시점과 공무상 요양 승인 결정일, 요양일수, 승인번호 등 기본 정보뿐 아니라 국가유공자 해당 여부, 담당 직원의 소속과 성명, 개인 연락처까지 상세히 기재해야 했다. 입원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상병 정보와 발병 경위, 공상 담당자의 확인·서약서도 별도로 제출해야 했다. PTSD의 경우 인사기록카드, 업무분장표, 발병과 연관된 주요 사건·사고 출동 내역까지 추가 증빙자료로 요구됐다.

◆국가가 처리 가능한데…개인에 부담 넘겨

문제는 단순히 서류와 기재 내용이 많다는 데만 있지 않다. 이 자료 대부분을 국가가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동 기록과 인사기록, 건강검진 자료는 행정기관 내부에 존재한다. 그러나 공상 신청 단계에서 자동으로 연계되지 않는다. 그 결과 재해자(업무와 관련된 사고로 인한 사망 또는 부상·질병자)는 국가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개인이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A소방관이 “신청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한 지점은 행정의 번거로움이 아니라 입증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구조 앞에 있었다.

이 같은 부담을 덜겠다며 2023년 공상추정제가 도입됐지만 현장에서는 체감 변화가 거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공상 신청 절차를 밟고 있는 한 유족은 “업무와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여전히 개인이 입증해야 한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정’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 절차에서는 여전히 개인이 증명하는 상황이다.

정미선 노무법인무등 공인노무사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건강 유해 인자’에 노출되는 근로자는 특수건강검진을 받고 소방공무원 역시 특수건강검진 대상”이라며 “이 과정에서 정신건강 상태도 점검하는 만큼 업무와 정신질환 간 인과성이 일정 부분 확인된다면 공상 인정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연계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이미 확보한 검진 결과를 공상 판단에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 노무사는 정부 기관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자료를 연동해 공상 신청에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부실한 법·예규…근무 환경 고려해야

공상 관련 법·예규도 부실함 그 자체다. 현행 규정은 정신질환을 ‘특수한 사건을 경험한 뒤 급성 스트레스 장애나 PTSD 진단을 받은 경우’로 한정한다. 특수한 사건의 예로는 아동이나 동료의 사망·목격, 전염병의 대규모 확산 등이 제시돼 있다. 그러나 소방 업무 특성상 극단적 사고만 있는 게 아니다. 교대근무로 인한 만성적 수면장애, 언제든 화염과 붕괴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상시 긴장감, 반복적인 사망·중상 사고 노출 역시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구조적 요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직무 특성은 공상 판단 기준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소방관의 직무 특성을 반영해 ‘극한 상황’과 ‘혹독한 근무 환경’에 대한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신질환 공상 신청이 어려운 배경에는 처리 기관의 인식 문제도 자리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근골격계 질환이나 암과 같은 물리적 질환은 비교적 쉽게 인정되는 반면, 정신질환은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한다. 과거 우울증 병력이 있는 소방관이 업무로 인해 PTSD가 악화됐다고 주장해도, 기존 병력을 이유로 불리한 판단을 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공상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병력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모순적인 구조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정신질환의 업무 기인성을 보다 세분화해 판단 기준을 매뉴얼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개인의 기질이나 병력보다 직무 환경과 업무 강도를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물리적 부상과 정신질환 사이의 공상 인정 체계가 지나치게 불균형한 점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족에 대한 심리적 지원·진단 필요

공상 신청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지난해 말 충북 혁신도시에 국립소방병원이 문을 열어 공상 소방공무원 치료를 시작했지만 이는 이미 발굴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직 분위기와 제도적 장벽 때문에 정신건강을 이유로 공상 신청을 주저하는 소방관을 선제적으로 발굴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못한다는 평가다.

전남도가 추진 중인 국립트라우마치료센터 역시 여·순사건 등 역사적 사건에 무게를 두고 있다. 광주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도 5·18 등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소방공무원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간단한 상담 프로그램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광주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 관계자는 “군과 경찰, 5·18 희생자 등 치유 대상자를 30여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어 소방인력에 대한 PTSD 치유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당장 우선순위가 높은 다른 대상자에 집중하고 있다”며 “파일럿 형태로도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유족에 대한 지원 역시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 노무사는 “공상 상담을 하다 보면 소방관 본인이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사망 이후 유족이 상담을 요청해 온다”며 “법률 요건을 검토하고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유족에 대한 심리적 지원과 진단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낙인’ 두려움…비대면 상담 등 보완 必

현행 소방 상담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재난·안전 분야 기업인 트래시스(주) 양국승 대표는 “기존 상담 체계인 소방 트라우마 상담 시스템은 연속성과 실효성이 부족하다”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비대면 기반의 상담 서비스가 더 나은 측면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관들의 정신건강을 선제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방관 건강진단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오륜석 조선대 소방재난관리학과 교수는 “소방관들은 특수한 조직 문화 속에서 낙인 효과를 민감하게 인식해 정신건강 상담과 공상 신청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며 “소방관 전원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진단을 의무화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삼섭기자 seobi@mdilbo.com

최류빈기자 rubi@mdilbo.com

# 연관뉴스
슬퍼요
1
후속기사
원해요
4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전남광주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

소방관 트라우마 국가 책임을 주요뉴스
댓글0
0/300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