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도는 역사적으로 군사적인 시설이 들어왔을 때 부흥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저항 정신이 강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배철지 완도문화원 완도학연구소장(시인)은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남해해상권을 장악해 국제무역을 주도했으나 사실상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면서 "장보고가 염장에게 시해를 당한 후 청해진이 폐지되고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옮겨 저수지 축조에 동원되는 등 굴곡진 역사를 지니게 됐다"고 말했다.
완도가 다시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기 시작한 것은 1522년(중종 17) 수군 기지인 가리포진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지금의 완도 군내리에 설치된 가리포진은 전라우수영 산하 수군진으로 완도와 진도·해남·강진·장흥 등 8곳을 관할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완도를 오갔고, 임진왜란 전후로도 번성한 곳이었다.
섬이 많은 완도는 유배지로 많이 거론되면서 유배문학이 싹트는 계기가 됐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삼천리'를 적용할 수 없었기에 바다 하나를 아득한 천리로 보고 섬을 유배지로 택했다. 강진에서 완도의 소안도까지, 거기서 다시 제주도에 이르면 3천리가 되는 셈이다.
신지도에서만 이세보 시조시인을 비롯 원교 이광사, 손암 정약전, 지석영 등이 유배생활을 했고 보길도에는 고산 윤선도가 머물려 '어부사시사'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완도의 유배문학은 일제강점기 저항정신으로 이어졌다. 소안면은 완도지역 항일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1920년대 6천여 주민 중 800여 명이 '일제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뜻의 '불령선인'으로 지목될 정도였다.
배 소장은 "소안도는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유공자가 22명이나 되고 면 단위로는 가장 많은 수"라며 "그 저항정신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 김만옥 시인을 비롯 임철우 소설가 등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작가들이 있고 정택진 소설가, 이원화 소설가, 오후랑 시인 등 전국에서 활발히 창작열을 과시하는 작가들이 즐비하다.
아쉬운 점도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각 자치단체마다 '문학'을 매개로 한 사업이나 프로그램을 기획해 내놓고 있는데 반해 완도는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배 소장은 "완도가 수산업이 발달한 도시다 보니 자체단체도 그 부문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는 것 같다"면서 "문화예술을 위해 필요한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인력도 양성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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