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를 겪은 여성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기억을 깊숙이 묻은 채 살아왔다.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머문 시간만 40여년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고통을 견디던 이들은 3년 전 처음 서로를 만났다. ‘열매’라는 이름 아래 모인 생존자들은 오늘도 서로를 붙잡으며 아직 끝나지 않은 치유의 시간을 함께 건너가고 있다.
5·18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이었다. 당시 처음 김선옥씨의 공개적인 피해 증언이 나오면서 오랫동안 개인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상처들도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공동조사단 활동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직권조사가 이어졌고,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처음 확인하게 됐다.
그 전까지 피해자 대부분은 자신이 겪은 일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성폭력 피해 사실이 드러날 경우 가족 관계가 무너지거나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해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진 뒤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거나 가족과 관계가 단절된 사례도 있었다.
조사와 간담회가 이어지면서 피해자들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고, “왜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공감했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피해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관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 같은 만남은 2023년 8월29일 자조모임 ‘열매’ 결성으로 이어졌다. 국가 조사 과정에서 얼굴을 마주했던 16명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단순 친목 모임이 아닌 치유와 회복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기로 했다.
열매 결성 이후 피해자들은 공개 증언에 나섰다. 이듬해 9월30일 국회에서 열린 증언대회는 40년 넘게 숨겨졌던 피해를 사회 앞에서 처음 이야기한 자리였다. 당시 피해자들은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 결정 이후에도 실질적인 후속 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고 있다며 치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증언 이후 피해자들의 삶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모임을 계기로 물리치료와 개인 상담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피해 이후 이어졌던 폭력과 단절, 경제적 어려움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폭력 이후 남겨진 상처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현재 열매는 매달 정기 모임과 심리 치유 프로그램, 상담 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다. 모임에서는 과거 피해 경험뿐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건강 문제와 생활고, 가족 관계의 어려움까지 함께 나눈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탓하며 살아왔던 피해자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인식 변화는 활동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열매는 심리 치유를 넘어 기록과 연대 활동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24년 12월에는 국가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이후 5·18보상법 개정 요구와 간담회, 의견서 제출 등 후속 활동도 이어갔다.
열매는 올해 비영리민간단체로 공식 출범했다. 지난 2월26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조직 출범을 선언했다.
열매는 창립 선언문을 통해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국가폭력 과정에서 발생한 성폭력의 존재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많은 과거사 젠더폭력이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며 “진실 규명과 사회적 치유, 제도 개선을 함께 추진하는 공적 조직으로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또 과거사 젠더폭력에 대한 사회 인식 제고, 국가 책임 이행 촉구, 피해자 존엄 회복을 위한 공동체 치유 기반 조성, 인권·평화운동과의 연대를 통한 폭력 재발 방지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앞으로 증언대회와 정책 제안 활동, 기록 사업 등을 통해 피해자 지원 활동도 이어갈 계획이다.
물론 상처가 모두 치유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상당수 피해자들은 트라우마와 생활고,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진상규명 이후에도 지속적인 치유 지원 체계와 생활 지원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달라진 점은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오랜 시간 숨겨야 할 존재로 남아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국가폭력의 진실을 증언한 생존자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깨는 용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고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지금도 계속 모이고 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 자체가 또 다른 치유와 연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열매 관계자는 “당사자들의 자조 모임으로 출발한 열매는 진상규명 이후에도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됐다”며 “국회 증언대회와 국가 상대 집단손해배상 청구 소송, 성폭력 피해 특성을 반영한 보상 제도 개선 요구 등을 통해 5·18 성폭력 문제의 제도적 해결과 치유 활동을 함께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 채 홀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며 “역사 속 공백으로 남겨졌던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기록되고 회복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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