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라운지] 평화를 스스로 결정할 힘

김영삼
업데이트 2026.08.27. 11:21
김영삼 광주전남김대중재단 사무처장

2026년 8월 17일 시작된 한미 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FS)’는 당초 27일까지 예정됐으나 21일 조기 종료됐다. 방어 중심의 1부만 진행됐고, 반격작전을 다루는 2부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대규모 한미 연합연습의 기간과 규모가 도중에 대폭 축소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연합연습 축소를 통해 북한에 유화적 신호를 보내고 북미 대화의 여건을 만들려는 조치라는 평가가 나왔다. 한편 장기화한 이란 전쟁과 낮은 지지율로 정치적 부담을 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미 대화 재개를 새로운 외교적 돌파구로 활용하려 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해석이 맞느냐보다 이번 일을 통해 다시 확인된 한반도의 구조적 현실이다. 우리의 안보와 평화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결정이 한미 간 충분한 협의 없이 동맹국 지도자의 국내 정치와 외교적 필요에 따라 갑자기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일은 오랜 분단의 시간을 살아온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중대한 결정에서 대한민국의 판단과 의지는 과연 얼마나 주도적으로 반영되고 있는가.

한반도의 평화와 대한민국의 안보에 대한 최종 책임은 대한민국에 있다. 동맹은 우리의 판단과 책임을 대신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역량을 바탕으로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는 협력체제다. 한미동맹 역시 어느 한쪽이 결정하고 다른 한쪽이 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중대한 사안을 대등하게 협의하고 그 결과를 함께 책임지는 관계여야 한다. 대한민국이 스스로 판단하고 지휘할 능력을 갖추는 것은 그러한 동맹의 전제다. 그 출발점이 전시작전통제권, 곧 전작권의 전환이다. 전작권은 쉽게 말해 한반도 유사시 한미연합방위체제에 편성된 양국 군의 작전을 누가 주도적으로 지휘·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권한이다. 전작권 전환은 우리 군이 국민과 영토의 안전을 주도적으로 책임지고, 그 역량을 바탕으로 미국과 더 대등하게 협력하기 위한 국가적 과제다. 이재명 대통령도 2026년 8월 18일 ‘을지국무회의’에서 전작권의 임기 내 환수를 당초 계획에 따라 차질 없이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전작권 전환은 전쟁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선택이다. 평화는 대화의 의지만으로도, 군사력만으로도 지켜지지 않는다. 대화가 필요할 때는 대화하고, 위기에는 단호히 대응하며, 그 시기와 방법을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군사적 역량과 민주적 통제, 국민적 신뢰도 함께 갖춰져야 한다. 따라서 전작권 전환은 어느 정부의 정치적 성과를 위해 시한만 앞세워 밀어붙일 일도, 준비 부족을 이유로 끝없이 미룰 일도 아니다. 부족한 역량과 제도는 계획적으로 보완하고 한미 간 긴밀한 협의를 통해 안정적으로 완수해야 한다. 준비될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전환할 목표로 필요한 역량을 국가가 책임 있게 갖춰 가야 한다.

이 대목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철학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와 협력의 적극 추진’이라는 세 가지 원칙 위에 서 있었다. 안보와 대화를 양자택일하지 않고, 확고한 방위태세를 토대로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 적대의 구조를 바꾸려는 현실적 평화론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는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수동적 평화도,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강압적 평화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지킬 역량을 갖추되, 그 힘을 대결이 아니라 대화와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삼는 능동적 평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주국방과 평화공존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다. 자주국방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힘이고, 평화공존은 그 힘이 지향해야 할 목적이다.

광주와 전남은 이 원칙을 누구보다 깊이 새겨야 할 역사적 이유가 있다. 전작권 전환과 5·18민주화운동은 서로 다른 사안이지만, 군사력이 누구의 통제 아래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는 맞닿아 있다. 1980년 5월 광주는 국가의 무력이 헌법과 민주적 통제를 벗어날 때 시민의 생명과 존엄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그 역사는 군사력의 크기만큼이나 그 힘을 누가, 어떤 절차와 책임 아래 통제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주국방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그 힘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민주적으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체계를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품고 2026년 7월 1일 출범한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평화의 기반을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일까지 중앙정부만의 몫일 수는 없다. 지방정부가 국가 간 협상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시민의 일상과 지역정책 속에서 평화를 구체화할 수는 있다. 통합특별시는 먼저 민주·인권·평화를 핵심 도시정신으로 세우고, 이를 행정과 예산은 물론 교육·문화·국제교류 정책 전반에 연결해야 한다. 선언에 머무는 평화가 아니라 예산과 사업, 제도로 작동하는 평화가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막혀 있을수록 준비는 더욱 치밀해야 한다. 광주와 전남이 지난 20여 년간 축적한 남북교류 경험과 민관 네트워크, 약 150억 원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은 한반도 정세가 바뀌는 순간 즉시 가동해야 할 지역의 전략자산이다. 농업·산림·해양·보건의료·에너지·인공지능 등 광주·전남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어떤 협력사업을 추진할지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남북관계가 좋아진 뒤에 준비할 것이 아니라, 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사업계획과 협력기관, 전문인력을 미리 갖춰야 한다. 국제기구와 해외 도시, 재외동포 사회와의 협력망도 꾸준히 넓혀야 한다.

평화를 위한 준비하는 일은 남북교류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시민들이 한반도 정세와 평화·안보 문제를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평화교육과 시민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을 대화와 숙의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틀도 갖춰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말하면서 정작 지역의 갈등을 대립과 힘으로 해결한다면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라고 말하기 어렵다. 평화가 특정 정권이나 단체의 구호를 넘어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가치가 되려면 시민의 이해와 참여,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81년 전 우리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한반도의 미래를 온전히 우리 손으로 결정하지는 못했다. 해방 직후 시작된 분할과 대립은 남북의 별도 정부 수립과 전쟁을 거치며 분단체제로 굳어졌다. 광복 81주년을 맞은 지금, 이제는 다음 세대에 어떤 한반도를 물려줄 것인지 스스로 답해야 한다. 평화를 지키고 만들어 가려면 스스로를 지킬 힘과 스스로 판단할 권한,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국민의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 전작권 전환은 그 책임을 실천하는 핵심 과제다. 대한민국은 평화를 남의 선택에 맡기는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판단하며 만들어 가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도 그 길에서 평화를 가장 끈질기게 준비하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제도로, 인권을 일상으로, 평화를 미래로. 그것이 광주와 전남이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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