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 골목이 무대가 되는 시간

김꽃비
업데이트 2026.09.22. 17:43
김꽃비 독립기획자
김꽃비 독립기획자

마을이 기억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개성 넘치는 건축물, 골목의 간판과 냄새,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정겨운 주민들의 이야기 등 방문객 저마다의 경험에 따라 각양각색의 인상으로 남는다. 광주 양림동은 아름다운 골목길의 숫자만큼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곳이다. 이 동네의 매력은 압도적인 스펙터클이 아니라 걷는 속도에 맞춰 조금씩 드러나는 장면들에 있다.

지금 양림동에서는 이런 골목의 매력을 한껏 즐길 수 있는 ‘2026 양림골목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양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와 기획자, 주민과 상인이 함께 만들어온 마을 중심의 골목 미술 축제다. 미술관 안에 작품을 모아두는 방식이 아니라 골목과 담벼락, 작가의 작업실과 일상의 공간을 전시장으로 삼는다. 최근에는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와 개최 시기를 맞춰가며 광주를 찾는 이들에게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축제들이 가능한 배경에는 예술가와 상인, 기획자, 유관기관이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협력의 구조가 있다. 작가들은 작업실을 개방하고, 상인들은 골목 상권으로 방문객을 맞이하며 기획자는 프로그램을 조율하고 행정은 조용히 이를 지원한다. 여러 주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지속해온 덕분에 양림동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문화 인프라를 갖추게 됐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와의 시너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번 비엔날레는 양림동 곳곳에 파빌리온 전시장을 두면서 본전시의 연장선으로 삼고 있다. 이장우 가옥, 이강하미술관, 우일선 선교사 사택, 이이남 스튜디오 등 양림동의 다양한 문화 공간들이 비엔날레 파빌리온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덕분에 지금 양림동 골목을 걸으면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과 골목비엔날레 참여 작품을 한 동선 안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며 볼 수 있다. 예술 지도를 손에 든 외국인 관광객들과도 심심찮게 마주치는데, 경기 침체로 ‘임대’ 표지가 늘어가던 골목이 오랜만에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새삼 뿌듯하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밖에도 다양한 연계 투어가 함께 운영된다. 그중 10월부터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진행되는 ‘양림모단 2026’을 약간의 사심을 담아 강력히 추천해본다. 양림동 골목을 걸으며 100년 전 근대 광주로 이동하는 장소 특정형 연극 투어로, 관객은 객석이 아니라 실제 골목에서 배우와 함께 이야기를 따라가며 독특한 몰입형 경험을 하게 된다. 저마다 매력적인 사연을 지닌 여덟 명의 배우를 따라가며 근대 광주의 숨겨진 역사를 배우게 되고 극 중간중간 개입하며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도 있다.

연극 ‘양림모단2026’ 배우들 /(주)쥬스컴퍼니 제공

이번 연극은 2016년 양림동에서 초연돼 2020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던 ‘1930모단걸다이어리’의 10주년 리부트 작품이다. 10년 전에는 커피를 좋아했던 시인 김현승, 음악가로 이름을 알렸던 정율성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인물들이 주인공이었다면, 이번 극에서는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이 활약한다. 한 명은 충장로에서 ‘김세상회’라는 가게를 열어 고무신 장사로 크게 성공했던 거상 ‘김세라’, 또 한 명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을 모티브로 삼은 ‘란’이라는 인물이다.

근대 광주에서 만날 법한 인물들이 골목 곳곳에서 등장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꽤나 매력적이고 1930년대 풍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소품과 무대로 만나는 낯선 동네 풍경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어, 비엔날레 기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는 공연이다. 특히 이번 연극 투어에서는 평소 개방되지 않는 최승효 고택을 연극 무대의 한 씬으로 들어가볼 수 있어 더욱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양림모단 2026’을 비롯한 이번 비엔날레의 프로그램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양림동이라는 동네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예술가와 상인들이 골목 곳곳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기획자는 이들을 연결한다. 행정은 그 이야기가 가능한 한 먼 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한다. 방문객은 전시를 보러 왔다가 마을을 걷게 되고, 마을을 걷다가 매력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만난다. 화려한 스펙터클 없이도 같은 자리에서 축제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순환에서 나온다.

골목이 무대가 되는 시간, 양림동의 변신은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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