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대표 명절인 추석은 가을걷이가 끝난 농경 사회의 풍요를 상징한다. 한 해 농사를 매조짓는 때다. 씰 수확은 노동집약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다. 큰 인구 부양력 만큼, 가족공동체 유지가 중요했다. 조상에 예를 다하는 풍습이 세대로 전해진 이유다. 햇 곡식·과일·채소 등으로 정성스레 차례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다.
집안의 연례행사였다. 어렸을 땐 몰랐다. 귀찮음과 고단함에 애써 외면했다. 2024년 추석은 달랐다. 철없는 폭염은 극성스러웠다.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문득, 한가위가 낯설었다. '열대야'와 '최고기온 신기록' 등의 단어가 연신 뉴스를 도배했다. 하석이란 말도 나왔다. 차례상은 단촐했다. 배·사과 등 과일과 고사리·시금치·배추 등 채소 생산량이 급감하면서다. 고기와 생선·전·반찬 등 음식도 간소화 됐다. 무더위에 상할까 우려해서다. 30여 년 전부터 집안 맏며느리로서 평생 차례상을 준비했던 60세 어머니 경험을 통해 달라진 추석 풍경을 담았다.
"휴∼."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새 나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여운 손주·손녀 볼 생각에 잠시 미소를 짓던 터였다. 환갑 되어 아직도 명절 음식 만드냐고 주변에서는 타박이지만 우리 애들이 명절 음식을 좋아하니 이것 또한 내 기쁨인 것을 어쩌나. '나물은 우리 딸이, 잡채는 우리 며느리가, 전은 아들과 손주가 좋아하니 그 웃는 눈이며 오물오물 씹는 볼만 봐도 기쁜 걸…'.
여름 휴가 때 딸이 사 준 땡땡이 반 팔 브라우스 아래 등에선 땀이 연신 흘러 내린다. 방 한 켠에는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지만, 한 낮 무더위를 물리치기엔 역부족이다. 9월 초도 아니고 중순인데도 한여름 날씨였다. 30도를 그냥 넘겼다. 에어컨은 언감생심. 정 못 참겠으면, 시원한 경로당에 가면된다. 애들 왔을 때 틀려면, 지금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비싼 전기요금 걱정 탓이다.
그냥 친정이나 가버릴까. 추석이라고 집에 오는 아이들에겐 티 안내려고 했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연휴 첫날 아침, 아들네에는 "전을 다 부치고 정리가 되는 점심쯤 오라"고 전화했다. 전 부치고 음식 하면 에어컨을 틀어도 온 집안이 더워질 것 같았서다. 어린 아들 키우는 며느리에게 괜스레 부담주기도 싫었다. '더우면 짜증만 더 나? 여러사람 짜증날 필요는 없지'.
아니나 다를까 같이 전을 지지던 딸이 볼멘소리를 한다.
"엄마! 우리 집은 전 언제까지 부쳐 먹을 거야!"
정말 언제까지 전을 부쳐 먹을지 잠깐 고민이 됐다. '앞으로는 여름이 더 길어진다는데 계속 이리 더우면 그냥 사다 먹을까? 더울 수록 사다 먹는 것도 무서운데….' 콧잔등에 맺힌 땀이 흐르자 '지글지글' 익어가는 전이 눈에 들어왔다. 고민에 고민이 거듭된다. "잔 말 말고, 부침가루나 좀 고루 묻혀." 만만한 딸에게 퉁을 놨다. 그래야 조용해 질 테니….
전을 올려 놓은 대바구니가 휑했다. 가짓수가 확 줄었서다. 손이 컸던 시어머니가 봤으면, 한소리 했을 터다. 전은 3~4년 전부터 조금씩 줄였다. 예전 같으면 대여섯가지 전을 부쳤을 텐데 재료 가격이 모두 올랐기 때문이다. 아들과 손주가 좋아하는 육전과 산적을 부치고 손이 많이 가고 이것저것 들어가는 동그랑땡은 냉동 해물완자를 사서 해동했다가 계란물만 입혀 지지기만 했다. 나물도 다섯 가지 하던 걸 세 가지로 줄였다.
차례상도 이상기후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상님께는 죄송하지만, 햇과일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명절 때마다 과일값이며 채소값이 들쑥 날쑥 해서 '굳이 거하게 차릴 필요가 있나' '가족들이 좋아하는 거나 몇 가지 하자'는 생각에 자꾸 과일사기가 망설여진다. 그 전 설에는 매번 받던 사과 선물도 곶감으로 바뀌기도 할 정도로 사과값이 금값이었다.
실제 사과는 10개 기준 통상 2만5천원 대 가격을 유지하다 역대 최장 장마와 태풍이 있었던 2020년 4만2천원대로 훌쩍 올랐다. 2023년엔 3만5천원 수준이었다. 집중호우와 폭염 등으로 인한 병해 확산 탓이었다. 좋은 건 한 알에 몇천 원씩이나 하니, 상에 올릴 겸 간식으로 먹을 겸 상자째로 사던 사과도 상에 올릴 만한 몇 개만 구입했다. 속으론 뜨끔했다. 조상님께 정성을 다하지 않는 듯 해서다.
채소 가격도 덩달아 널뛰기했다. 잡채·나물 등에 쓰이는 시금치는 100g 기준 1천원 미만이었던 2015년과 2017년을 제외하고는 2021년까지 1천원 중반대를 왔다갔다 했다. 하지만 이상기후가 나타난 2022년에는 2천378원, 지난해에는 3천944원까지 뛰었다. 지난 여름, 폭염과 집중호우가 되풀이 됐기 때문이다.
힘들게 만든 차례 음식을 보관하는 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음식이 혹여 상할 까 새벽에도 부엌을 몇 차례 들락날락 했다. 전은 다 지진 후에 한 김 식힐 겸 상온에 두고 보관했는데 날이 너무 더우니 금방 상할 것 같았다. 점심 때 아들네 오면 다 함께 맛있게 맛도 봐야 하는데 벌써 냉장고에 넣자니 아쉬워서 대신 에어컨을 조금 더 세게 틀었다. 에어컨 온도를 22도까지 내린 추석이라니. 그래도 불안해서 먹기 전에 냄새를 꼭 맡아보고 먼저 먹었다. 전공의 파업까지 겹쳐서 응급실 가기가 어렵다보니 식중독이 어찌나 무섭던지….
요즘 식중독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가을·겨울에도 안심할 수 업다. 2020년 70명이었던 광주지역 집단 식중독 환자는 2023년 901명까지 늘었다. 파업 등으로 병원가기 힘들었던 2024년에도 315명이 고생했다.
성묘는 고행이었다. 그 날은 35도가 넘었다. 부모님 모신 공원은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이라 아침 일찍 우리 부부만 다녀왔다. 원래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 먹고 느긋하게 아들네, 딸과 함께 갔는데. 차례를 서둘러 모시고 아침 7시부터 서둘러 다녀왔다. '아침이라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묘지에 도착하자 숨이 턱 막혔다.
부모님 묘지까지 조금 올라가는데도 등과 얼굴에 땀이 후줄근했다. 전보다 옷을 가볍게 입고 갔는데도 그랬다. 산소 차례에 놓을 음식도 정말 간단히 가져갔다. 송편 조금과 전 하나씩, 북어포만 해서 보냉백에 꽁꽁 쌌다. 이런 날씨면 금방 쉴 것 같은데다 앉아서 음복할 자신도 없었다. 남편에게 '부모님을 봉안당으로 모시자'는 말을 꺼냈다. 덥고 추워도, 비가 쏟아지거나 땡볕이어도 실내니까 인사드리기 좋아서다. 그나마도 우리는 벌초를 안 해도 돼서 다행이었다. 옆집 창수네는 벌초 때문에 애 좀 먹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벌초 대행 서비스를 쓴 친구도 있었다.
날씨 하나 변덕이었을 뿐인데 추석은 정말 많이도 달랐다. 올 추석도 걱정이다. 벌써부터 이리 더워서야….
강승희기자 wlog@mdilbo.com
이 기획기사는 서사적 글쓰기인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을 활용했습니다. 지난해 추석 연휴에 폭염 등 길어진 여름 탓에 명절 풍경이 바뀐 경험 등을 현장감 있게 전달해 보자는 취지에서입니다. 관찰자로서 기자 자신이 직접 일하면서 보고 느낀 감정과 인간관계 등을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했습니다. 폭염·극한호우 등 이상기후가 현실화 되면서 명절 차례상·성묘 등 생활상이 바뀌면서 발생하는 문제점과 위험성 등을 독자 여러분들께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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