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저는 스물일곱이었고, 네 살배기의 엄마이자 임신 3개월차 임산부였습니다. 그날 이후론 얼룩무늬 군복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고, 그 아저씨(계엄군)에게서 나던 술·땀 냄새와 비슷한 냄새만 맡아도 토를 해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가한 최경숙(71)씨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1980년 5월 중순 어느날. 당시 27세였던 최씨는 시댁에 맡겨둔 네 살배기 아이를 데리러 가던 중 광주 도심 전남여고 후문 담벼락에서 계엄군 2명에게 붙잡혀 성폭행당했다.
계엄군은 최씨의 차에 불을 지르겠다며 협박했고, 앞니가 흔들릴 정도로 얼굴을 구타했다. 일부는 차 밖에서 망을 봤다.
최씨는 "그때 몸이 장작개비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결국 유산했다"며 "군복만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두 아들은 군인이 아닌 의무경찰로 입대시켰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며 그 아저씨(계엄군)에게서 나던 냄새가 생생해 일상생활에서도 수없이 헛구역질을 한다"고 털어놨다.
이날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 15명으로 구성된 증언 모임 '열매'가 주관한 증언대회에는 최씨 외에도 3명의 피해자가 참석해 44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직접 증언했다.
19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최미자(62)씨는 "사람들이 도망치길래 같이 뛰다 군인에게 잡혔다. 머리채를 잡힌 채 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군인 여러 명이 달려들어 나를 벽으로 끌고간 뒤 몸을 만졌다. 이후 어깨를 대검으로 찌른 뒤 가버렸다"고 했다. 기절한 최씨는 근처 대학생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최씨는 "두께가 있는 남방과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남방이 다 찢겨 있었다. 군인들이 장갑을 낀 손으로 (몸을) 세게 쥐어짜는 느낌이 너무 선명하고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이어 "5·18 이후 쫓기듯 결혼한 남편과의 성관계도 무섭고 싫었다"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결국 이혼했다"고 털어놨다.
김복희 열매 대표는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게 끌려가 조사받던 중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아픈 기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게 너무 두렵지만, 다시는 국가가 국민에게 무력으로 불행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하기에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5·18 성폭력 피해는 억압의 중첩성 탓에 더 커졌다고 강조했다.
군부독재와 결부된 국가폭력의 역사성, 성폭력 피해자를 '정조를 잃은 여성'으로 비난하는 가부장적인 성차별 통념,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통념의 내면화로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게 됐고, 그 때문에 사건 이후 생애 전반에 걸쳐 신체적·정신적·사회 관계적 영역에서 연쇄적으로 누적되는 복합적 후유증을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날 대회에 참석한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정부의 후속 조치를 촉구했다.
지난 6월 활동을 종료한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성폭력 부문 팀장을 맡았던 윤경회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간사는 "피해자들의 고통은 40년 동안 이어졌고, 조사위에서 대통령실에 진상규명 결정을 보고했으나 정부는 지난 3개월 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며 "오늘 이 자리는 다음을 위한 자리"라고 강조했다.
앞서 5·18 진상규명위는 민주화운동 기간 계엄군 성폭력이 의심되는 52건의 사건을 포착했으나 지난해 12월 16건에 대해서만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미 상당수 피해자와 유족이 숨졌거나 과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위는 이같은 내용이 담긴 '진상규명조사보고서'를 채택했고, 이후 대정부 권고사항이 수록된 종합보고서를 정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정부에선 피해자들에게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를 보낸 것 외에 별다른 후속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족한 조사 역량 등으로 인해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밝히지 못했고, 이미 보고한 진상규명 결정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며 "추가적인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뉴시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