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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벌초 단상

@유지호 입력 2024.09.04. 16:58

집안의 연례행사였다. 이른 일요일 아침, "가자"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나선 게 '국민학생' 때인 40년 전 쯤이다. 옛 완행버스를 타고 흙먼지 나는 산길과 논두렁을 가없이 걸었다. 20여기 봉분이 이 산, 저 논·밭 주변으로 흩어져 있어서다. 처서가 지나면 으레 '반드시 할 일'이었던 벌초 이야기다. 추석은 민족 대표 명절이다. 산소의 풀을 깎아 깨끗이 정리하는 일은 그 출발점이었다.

어렸을 적엔 고역이었다. 손에 설어 위험한 낫질보단 심부름을 도맡았다. 인근 점빵에서 빵과 음료수 등 군것질거리를 사오는 것이다. 걷다 보면 뱀과 벌은 어찌나 많던지. 유일한 재미는 점심이었다. 역할 분담했던 친척들이 한 곳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손수 챙기신 배낭엔 숫돌과 낫 외에도, 버너와 코펠, 쌀·돼지고기 등이 들었다. 조약돌 살포시 올린 냄비 뚜껑 아래서 보글보글 끓던 밥과 김치찌개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산소를 못찾아 헤맬 때도 있었다. 산림 환경이 바뀌면서다. 산판과 도로 작업 탓이었다. 길이 없어진 곳에선 잡초와 칡넝쿨을 쳐내며 나아가야 했다. '시오 리 산길을 걸어/풍수설을 신봉하는 늙은 농부/아버지를 따라//이제 이런 깊은 산중은/나무꾼의 발길도 끊겨/길을 종잡을 수 없는데도 아버지는/부지런히 낫을 휘두르며 앞장서 나아간다'. 전라남도 담양 출신의 시인 최두석의 '추석 성묘길에' 한 대목이다.

그 땐 몰랐다. 고단함에 핑계를 대기도 했다. 한가위는 가을걷이가 끝난 농경 사회의 풍요를 상징한다. 한 해 농사를 매조짓는 때다. 1980∼90년대 넉넉치 않던 농촌에서 추석빔을 입고 고기 맛을 볼 수 있었다. 씰 수확은 노동집약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다. 큰 인구 부양력 만큼, 가족공동체 유지가 중요했다. 조상에 예를 다하는 풍습이 세대로 전해진 이유다. 햇 곡식으로 차린 차례·성묘를 준비하면서다.

며칠 뒤면 백로다. 벌초를 서둘러야 할 때가 됐다는 거다. 풀과 잡초가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다. 벌초도 시대상에 따라 변하고 있는 것이다. 20여년 전까진 예초기 말도 못 꺼냈다. '예의 없는 짓'이라며 퉁을 놨기 때문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젠 대행업까지 성행한다. 고향엔 예초기 돌릴 사람도 없다고 한다. 고령화 탓이다. MZ세대 아들이 쉬이 따라 나설까. 산소는 찾을 수 있을까. 어느덧, 이맘 때 선친의 걱정이 나에게 옮아왔다.

유지호 디지털본부장 hwaone@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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