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권익위원칼럼] 국가를 넘어 도시로, 기술을 넘어 연대로: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UCCN) 파빌리온

김허경
업데이트 2026.09.16. 14:36
김허경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 센터장


기술의 속도가 인간의 호흡을 앞지를 때, 도시는 침묵을 강요당한다. 매끄러운 유리 빌딩과 초고속 데이터망이 덮인 화려한 표면 아래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흔과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손쉽게 지워내고 있는가. 도시는 새로움을 좇아 질주하지만,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켜켜이 품어내는 다층적 유기체다. 무심코 스쳐 지나간 그 어떤 기억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계문명이 집어삼킨 파편들을 건져 올리고 소외된 존재들의 숨결을 되살리는 예술적 실천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다.

2018년 세 개 국가로 첫발을 뗀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은 근대 국가주의의 유산인 베니스의 국가관 체제를 넘어, 도시의 골목과 역사적 장소성에 예술을 스며들게 한 급진적 실험이었다. 본전시의 담론을 도시 전역으로 확장하며 미술관의 폐쇄된 백색 입방체(White Cube)를 탈피해 온 이 여정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기념비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바로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의 기획으로 사상 처음 출범시킨 ‘UCCN 파빌리온’이다.

이 파빌리온에 ‘UCCN’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이유는 명확하다. 특정 국가나 개별 기관 중심의 배타적 전시 형태를 탈피해, 광주가 중심 허브가 되어 전 세계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엮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해외 작품의 집합소가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광주의 장소성과 글로벌 도시 네트워크가 수평적으로 결합한 다자간 문화 연대의 실천체다.

이 연대의 심장에는 202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정책회의가 천명한 ‘몬디아컬트(MONDIACULT)’ 선언이 흐른다. 문화를 자본의 소비재나 기술 경쟁의 도구로 축소하기를 거부하고, 인류 공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글로벌 공공재’이자 기본적 권리로 규정한 결의다. 이번 전시 ‘몬디아컬트 스케이프: 도시의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국가주의적 경쟁 구도를 허물고 도시와 공동체 간의 연대를 천명하는 국제적 문화 연대의 선언문이다.

생성형 AI와 몰입형 인터랙션이 범람하는 시대, 미디어아트는 종종 기술적 스펙터클에 함몰되곤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참여한 국내외 10인의 작가들은 차가운 디지털 언어를 도시의 심연을 더듬는 ‘시적 탐침(Poetic Probe)’으로 치환했다. G.MAP 전시장으로 발을 들이면 기술이 가닿은 숭고한 실존의 풍경이 펼쳐진다. 위고 아르삭은 VR 작품 ‘카타바시스’를 통해 뉴욕 마천루 아래 웅크린 노동자와 홈리스들의 지하 세계로 관객을 이끌며, 가상현실을 도피처가 아닌 절박한 실존의 증언대로 탈바꿈시킨다. 베트남 전쟁 당시 쏟아진 불발탄 쇳조각을 우아한 키네틱 모빌로 변모시킨 투안 앤드루 응우옌의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묻히지 못한 소리들’은 파괴의 파편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유의 제의로 승화하였다.

이 역사적 상흔들은 인간과 비인간, 로컬과 글로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존재론적 성찰로 확장된다. 컴퓨터 자판을 타건하는 나무 뼈와 폴리 사운드로 탈북민, 해녀, 잠수사 등 경계인들의 심연을 길어 올린 김한결의 ‘쇼어’, 대형 반투명 스크린의 교차 운동을 통해 물리적 실재와 데이터가 이미 하나의 몸으로 얽혀 있음을 직관하게 하는 강이연의 ‘ENTANGLEMENT’가 그렇다. 여기에 AI 알고리즘으로 아제르바이잔 전통 카펫의 맥을 잇는 오르한 마마도프와 조선 책가도를 해체해 지식의 역사를 거대한 문자의 폭포로 쏟아낸 이이남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은 기술을 매개로 소멸해가는 기억의 지층을 복원한다.

이 서사는 실내 전시장에 갇히지 않고 G.MAP 외벽 미디어파사드월과 도시의 관문인 광주송정역으로 뻗어 나가며 광주라는 도시의 공공적 시공간과 맞닿는다. 우리가 지금 G.MAP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첨단 기술이 어떻게 도시의 상처를 따스한 공공재로 감싸 안는지, 그리고 광주가 민주와 인권의 도시를 넘어 세계를 향해 어떤 품격 있는 연대의 손을 건네고 있는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과 데이터의 지층 위에서, 우리는 지금 가장 견고하고 눈부신 도시의 내일을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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