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된 기집애. 네 나이 이미 다섯인데 어찌 바보같이 울기나 잘하느냐. (중략) 너의 애비 지지리 못나 복된 것이라곤 지닌 것도 지닐 것도 없으니, 텅 빈 가슴, 회한의 독기만 서려 내 네게 줄 것이라곤 욕 뿐. 볼 때마다 욕 뿐. (중략) 너는 또 꿈을 꾸지 마라. 왕자님 공주님이 세상에 어디 있니, 바보 같은 녀석. (중략) 울고 싶거든 속으로 울어라. 속으로 울어울어 한으로 맺힐 때까지. 한 서린 심장에 뛰는 피 조그만 네 육신을 돌고 돌아 어엿한 여인이 되면, 세찬바람 부는 세상 애비 스러져도, 네 고향 억척 같은 땅 돌패기를 칭칭 휘감은 실거리 가시나무처럼 탐스런 꽃·깍지도 맺으면서 살리라. 1983, 10, 요배.’

단발의 30대 남성과 예쁜 옷에 구두를 신은 딸이 사이좋게 서 있는 모습을 펜으로 그린 ‘딸에게’에는 연필로 쓴 편지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아직 다섯살 밖에 안됐다는데 왜 이렇게 모질게 말할까’ 싶기도 하지만 언제 조용히 사라질지 모르는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이 없어도 굳세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눈물이다.
1984년 완성된 이 작품은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대가로 꼽히는 강요배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던 때를 이같이 회상한다.
“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날이 갈 수록 심해지던 때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내가 오래 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쓰고 그렸죠.”

‘민중미술 1세대 작가’ ‘대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금의 강요배 역시 처음부터 단단한 거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군부독재의 공포정치 속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 가족을 향한 미안함과 두려움 같은 시간들이 그의 삶과 세계 안에 겹겹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광주시립미술관이 2026민주인권평화전으로 마련한 ‘강요배-시간을 품다’는 이 같은 한 인간과 풍경 안에 축적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 또한 그의 시간과 시선이 축적된 최근 작업부터 시작해 그 안의 시간을 만날 수 있도록 제주 귀향 이후 작업, 시대를 마주한 작업, 청년기 작업 순으로 진행된다.
‘축적된 시간’은 그의 작업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보는 장면, 풍경에는 지나간 시간 모두가 축적돼 있다는 것이 그의 시선이다.
그는 “한 풍경과 역사는 사진처럼 그 순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이 쌓인 순간이고 앞으로 시간을 쌓는 과정에 있는 모습이다”며 “우리가 상처 받고 치유하는 과정에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상처를 품은 채 뿌리 내리는 생명력과 스스로 회복해가는 모습 자체가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오늘날 광주의 푸른 하늘도, 제주의 파란 바다도 상흔과 치유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자리 위에 놓여 있다. 그때의 시간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가닿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지금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또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번 전시는 그의 제주 풍경 작품, 4·3기록화 뿐만아니라 1980년대 광주에서 전시됐던 작품을 다시 한번 전시하며 이 전시를 위해 작업한 신작 ‘광음(光音)’ ‘철목(鐵木)’ ‘망월’도 선보인다. 이와 함께 제주4·3기록화 연작을 영상화한 ‘동백꽃 지다’, ‘인간을 도우시다’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강 작가는 “광주라는 도시에서 60여년 작업들을 보일 수 있다니 영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걱정도 된다”고 소회를 전했다.
윤익 시립미술관 관장은 “강요배 작가는 민중미술을 인간의 보편적 세계로 확장시킨 작가”라며 “특히 제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미술 작가로 제주의 풍경과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함께 해 지역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위상을 보여준다. 민주, 인권, 평화의 가치가 오늘날의 질문과 미래의 사유로 이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강요배는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하며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발언해왔으며 1992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가 제주4·3을 화폭에 담으며 ‘제주4·3작가’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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