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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호랑이의 기개, 대를 이어 전해지다

입력 2025.11.12. 16:58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18 황병학
진월면 망덕만서 첫 전투 치러
과감한 헌병분견소 본대 공격
특공조로 헌병 포박·총기 탈취
임시정부 도움으로 만주 망명
손자는 5·18 주남마을 희생자
광양시 진상면 비촌마을에 위치한 황순모 의병장(왼쪽)과 황병학 의병장(오른쪽) 기념비.광양시 제공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광양 출신 황병학 의병장이 1908년 7월 26일 의병을 일으키면서 발표한 격문이다. 200여 명의 의병들이 모였다.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됐고, 5촌 당숙인 황순모는 선봉장을 맡았다. 그들 대부분은 산포수들이다. 사냥꾼들이라 지리에 밝고 사격술도 능해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졌다. 이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황병학은 광양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만주에서까지 독립운동에 힘쓴 남도 의병장이다.

황병학 의병장이 태어난 비촌마을 옛 터인 수어댐 전경.광양시 제공

◆광양 헌병분견소 농락한 의병부대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던 1876년 1월 11일, 황병학은 광양군 진상면 비평리에서 아버지 황재모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이다. 어려서부터 서당과 향교에서 한학을 배웠고, 광양의 명산 백운산을 오르내리면서 사냥을 즐겼다.

황병학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치열한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자 자신도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첫 전투는 1908년 8월 5일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 전투였다. 황병학은 망덕포구에 일본 선박 1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격과 수영에 능한 150여 명을 뽑아 특공대를 편성했다. 80여 명으로 편성된 제1대는 10여 척의 일본 선박을 기습 공격했다.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잠에 취해 있던 일본인 다수를 사살했다. 제2대는 망덕포구 부근의 일본인 주거지를 습격했다. 10여 채의 일본인 가옥을 불태우고 4명의 일본인을 사살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다수의 무기도 노획했다.

황병학 의병장이 첫 전투를 치른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 전경.광양시 제공

망덕만 전투에서 승리한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을 거점 삼아 일본군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1908년 9월 초순, 순천 주둔 헌병분대와 광양 헌병분견소 병력이 합동작전으로 백운산에 주둔한 황병학 부대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00명의 정예 의병을 특공대로 편성해 광양 옥곡면 옥곡원 뒷산 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기습 공격을 단행해 적들을 다수 사살해 퇴각시켰다. 황병학은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적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전투 대열을 갖추기 전에 박살을 내야 한다. 기운을 내라"고 의병들을 독려해 결국 승전을 거두었다.

한 달여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돌아온 황병학 의병장은, 1909년 1월 일본군 습격을 계획했다. 일본군이 의병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주력하자 광양 헌병분견소 본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백운산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공격 루트와 퇴각 루트를 달리했다. 1909년 1월 23일 밤, 50여 명의 특공조가 광양 헌병분견소에 은밀히 잠입해 총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 헌병들을 전원 포박한 다음, 10여 정의 총기를 빼앗았다.

이에 일본군은 대대적인 보복 작전을 전개했다. 황씨 집안의 집성촌인 비촌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고,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황순모는 가족들의 후환을 걱정해 귀순했지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이 백운산을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자 황병학은 백운산을 포기하고 여천 앞바다에 있는 묘도로 근거지를 옮기려고 했다.

1909년 7월 19일 광양면 황금동 나루터에서 묘도로 가려고 선박에 승선하고 있던 중, 이 사실을 알고 대기 중인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100여 명의 의병 가운데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다. 황병학은 부상을 입은 채 겨우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다. 특히 일본군이 전개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타격을 입고 재기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황병학 의병장은, 국권 회복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했다.

황병학과 황순모 등 광양 출신 독립유공자 34명의 이름이 새겨진 광양 독립유공자 추모탑.광양시 제공

◆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손자는 민주화운동

황병학은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고흥에서 활동하던 기산도를 만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했다. 그러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군자금 모금책임자로 훗날 임시정부 국무위원까지 역임한 함평 출신 김철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을 조직하는 데 동참했다. 의무금 모집단에는 기산도·김철·김종택·이인행·박은용·김영탁·민치환·이문복 등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국립대회취지서, 고유문 등을 인쇄해 순천, 곡성, 남원, 순창 일대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부호들을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1919년 10월 동료 김종택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탄로 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 망명을 결심했다. 11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 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병학이 만주로 망명한 후인 1920년 7월 19일 일제는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3년형이 처해졌다. 그는 주로 용정촌, 흑룡강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1923년 봄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 의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평양형무소에서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1927년 출옥해 귀향했다.

이후에도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해 재차 만주로 망명을 시도했다. 의병 전쟁 중에 입은 총상의 악화, 일경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 그리고 4년여에 걸친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인해 1931년 4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비촌마을에 있는 황병학의병백운산전투비.광양시 제공

현재 황병학의 흔적은 그의 첫 전투지인 광양 진월면 망덕포구와 그의 고향인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황병학 아들 황길현은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손자 황호걸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이다. 황호걸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에 다녔다. 3학년이던 황호걸은 도청 지하실에서 시신 닦는 일을 했다. 시신을 안치할 관이 부족해지자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다가 주남마을 앞에서 계엄군들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유명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때 희생됐다. 본인은 '독립운동', 아들은 한국전쟁 '학도의용군', 손자는 '5·18 유공자'였다. 황병학 가문은 의향을 정체성을 빛낸 대표적 가문이라 하겠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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