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서 동학농민군을 육성해 낸 훈련대장 오윤영

차솔빈 기자
업데이트 2026.08.19. 18:35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17. 오윤영
고흥에서 소재가 확인된 오윤영 묘소. 독자제공

최근 전라남도가 추진한 동학농민혁명 유적 전수조사 과정에서 고흥 동학농민군 지도자 오윤영의 묘소가 확인됐다. 새로 발굴한 토지대장에 기록된 위치를 따라 광주특별시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산 82를 조사한 결과 실제 묘소가 발견됐다. 그런데 묘비에는 ‘윤영’이 아니라 ‘명영(命泳)’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동복 오씨 족보에도 같은 이름이 기록돼 있어 묘의 주인이 오윤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계속된 탄압을 피하려고 이름을 달리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윤영은 1850년 10월 16일 흥양현, 오늘날 광주특별시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에서 오상권과 능성 구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상권은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재력가이면서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봉림마을에는 지금도 그의 효행을 기리는 비가 남아 있다. 1861년 금탑사 대법당의 금고를 새로 조성하면서 작성한 기록에도 오상권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여러 시주자 가운데 세 번째로 많은 재물을 내놓았다. 오윤영이 훗날 자신의 재산을 동학농민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던 데에는 이러한 집안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

고흥 동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등장한 세력이 아니었다. 고흥 동학교도들은 1893년 교조신원운동 당시 금구집회에 참여한 뒤 보은집회로 이동했다. 이는 고흥 동학조직이 금구집회를 이끈 전봉준·김개남 등 호남 남접 지도자들과 일찍부터 연결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계는 이듬해 김개남 세력이 전라좌도로 진출하고, 그의 휘하에 있던 금구 출신 김인배가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할 수 있었던 조직적 배경이 됐다.

1894년 제1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고흥 동학농민군도 봉기에 참여해 전주성에 들어갔다. 곧 전주화약이 체결되자 전주성에서 철수한 이들은 구례를 거쳐 고흥으로 돌아왔다. 이후 도소와 집강소를 설치하고 탐관오리와 토호의 횡포를 바로잡으며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고흥 동학농민군은 지방행정을 개혁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제2차 봉기에 나섰다. 이 무렵 고흥에서는 포두면 봉림과 도양 원동 일대에 두 곳의 농민군 훈련소가 운영됐다. 이 가운데 봉림 훈련소를 책임진 인물이 접주 오윤영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훈련소를 운영하고 직접 훈련대장을 맡았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재산을 항일 전쟁을 준비하는 데 바친 것이다.

봉림 훈련소의 운영은 체계적이었다. 오윤영이 훈련소 운영과 군사훈련을 총괄하고, 신학구는 농민군에게 필요한 식량과 무기를 담당하였다. 신춘휴는 말타기와 무예를 가르쳤다. 이들은 농민들을 단순히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한 뒤 부대를 편성했다. 오윤영은 군사훈련은 물론 농민군의 숙식과 무기 마련까지 책임져야 했다.

많은 농민군을 먹이기 위해 마을에는 큰 솥을 걸었다. 군사들이 생활할 장막도 설치하였다. 장막을 치고 솥을 걸었던 마을의 논을 지금까지 ‘막배미’라고 부른다. 이 지명은 130여 년 전 봉림마을에서 많은 농민군이 머물며 훈련했던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문헌 기록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훈련소의 실제 모습이 마을의 지명과 주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봉림 훈련소는 전투를 앞두고 농민군이 잠시 모였다 떠나는 임시 집결지가 아니었다. 군사를 계속 모집하고 훈련해 부대를 편성하고, 식량과 무기를 마련해 전선으로 보내는 상설 군사기지에 가까웠다. 전투에서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새로운 농민군을 충원해 부대를 재편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신병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교육기관이면서 전선에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후방기지였다.

이러한 군사적 기반은 고흥 동학농민군이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힘이 되었다. 다음에 설명할 유희도를 중심으로 고흥 지역이 비교적 일사불란하게 통제될 수 있었던 것도 봉림과 도양 훈련소에서 길러낸 농민군의 군사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고흥 동학의 특징은 향촌의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는 동시에 조직적으로 군사력을 키웠다는 데 있었다.

고흥 동학농민군의 활동 무대는 고흥에 머물지 않았다. 1894년 8월 20일 김개남이 남원에 도회소를 설치하자 흥양과 보성 등지의 농민군이 대거 합류했다. 이는 고흥 동학조직이 김개남 계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지역 훈련소에서 길러낸 병력이 전라좌도의 주요 거점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고흥 농민군은 순천으로 이동해 김인배가 이끄는 영호도회소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섬진강을 건너 하동으로 진출하고 진주를 비롯한 경남 서부 여러 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일부 병력은 남원의 김개남 세력과 결합하여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894년 9월 김개남의 주력부대가 북상한 뒤에도 영호도회소와 고흥 동학농민군은 전라좌도와 경남 서부의 전선을 지탱하는 역할을 맡았다.

7월 말 이후 고흥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잘 확인되지 않는 것도 조직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봉림과 도양에서 훈련받은 병력이 하동·진주 등 외부 전선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고흥은 전투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 아니라, 전선에 병력과 물자를 지속해서 공급하는 후방 군사기지였다. 이러한 역할의 중심에 봉림 훈련소와 그 운영 책임자 오윤영이 있었다.

오윤영의 조련장이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흥군 봉림면 일원. 차솔빈 기자

고흥 동학농민군은 이후 장흥으로 이동해 석대들 전투에도 참여했다. 장흥에서는 일본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무려 네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하동과 진주를 거쳐 장흥까지 이어진 넓은 전선에 고흥 농민군이 계속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의 훈련소에서 병력이 충원되고 부대가 재편됐기 때문이다. 봉림 훈련소는 순천 영호도회소의 하동 진출을 지원하고 장흥 전선을 뒷받침한 주요 거점이었다.

재차 언급했듯 고흥의 봉림과 도양 훈련소는 농민군을 모집하고 훈련해 여러 전선으로 보내는 주요 병력 공급기지였다. 일본군이 고흥을 직접 공격한 것도 이러한 조직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1895년 1월 7일 일본군과 고흥 동학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교전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군은 새로운 병력을 끊임없이 길러내던 고흥의 훈련소와 지역 조직을 뿌리째 없애려 했다. 일본군의 고흥 공격은 이 지역이 동학농민군의 중요한 후방기지이자 병력 공급처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윤영도 흥양성 공방전 과정에서 체포돼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총포군장 김정태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관련 자료에는 오윤영이 자신이 소유한 많은 전답을 내주고 구명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석방에는 그보다 깊은 사연이 있었다.

김정태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산모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이를 알게 된 오윤영이 경제적으로 도와줬다고 한다. 훗날 체포된 오윤영이 김정태 앞에 끌려오자 김정태는 과거에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그의 목숨을 구해줬다.

이 일화는 오윤영이 단지 농민군을 훈련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평소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곤궁한 이웃을 도왔고,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재산을 내놓아 농민군을 먹이고 훈련하였다. 김정태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구한 것도 오윤영이 평소 실천한 삶에서 비롯됐다.

혁명이 좌절된 뒤에도 오윤영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1918년 11월 24일 생을 마칠 때까지 자신이 꿈꾸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뜻을 간직했다. 현재 봉림리에 있는 묘소는 2001년에 이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 ‘명영’이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던 그의 묘가 토지대장과 족보, 묘비 기록의 대조를 통해 비로소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윤영의 묘소가 확인된 의미는 잊힌 동학 지도자 한 사람의 무덤을 찾았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의 생애를 통해 고흥 동학농민군이 어떻게 조직되고 훈련했는지, 순천 영호도회소를 거쳐 하동·진주·장흥 전선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됐다. 특히 봉림 훈련소는 동학농민군이 일시적으로 모였다 흩어진 군중이 아니라 모집·훈련·편성·보급 체계를 갖춘 군사조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국권 침탈에 맞서 일어난 항일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윤영과 고흥 동학농민군의 투쟁은 이후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의 재산을 풀어 농민군을 먹이고 훈련시켜 전선으로 보낸 오윤영의 삶은 고흥 동학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그의 묘소와 봉림 훈련소 터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정비해, 고흥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와 오윤영의 뜻을 온전히 되살려야 한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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