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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와 궤를 같이하며 조직적 독립활동 전개

입력 2023.09.20. 18:36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
⑦광복의 순간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의 불꽃, 무등독서회(하)
곽이섭 독립유공자 후손 곽수민 화백이 독도 서화작품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에 기증했다. 광주시교육청 제공

[박해현의 독립운동가 교사 열전]⑦광복의 순간까지 이어진 학생운동의 불꽃, 무등독서회(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된 비밀결사 무등독서회는 1941년 9월 옥대호, 곽이섭 등 1941년 4월 입학한 무안 출신 광주사범 5회가 주축을 이루어 만든 무안향우회가 그 시초였다. 그들은 1학년 말이 되는 1942년 2월 무안향우회를 무등독서회로 개칭했다. 이때 창립 회원은 10명이었다. 이때 임원을 보면 무등독서회가 출범 초기부터 방송청취, 전국사범연락원 등을 조직도에 둔 것으로 볼 때 독립운동 비밀 조직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처음 10명으로 출범한 조직은 곧 19명으로 확장됐다. 위 인물 외에 곽이섭(무안), 허종철(함평, 광주교대 50년사는 무안으로 나와 있으나 옥대호 육필원고에는 함평으로 나와 있음), 김갑수(광산), 정병광(무안), 김용덕(전북), 천충식(해남). 김상중(장성). 이석규(전북), 유창렬(광주), 박현채(영암), 홍창기(전북), 최정주(담양) 등이 확정된 명단이다.

이들은 무등독서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 학교와 연대를 꾀했다. 홍완표가 이 일을 담당했는데, 광주사범과 전주사범, 순창농림학교, 전주북중학교와 연합학도대를 편성하는 등 전국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다.

무등독서회 강령을 만들었다. 몇 차례 수정을 거쳐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그 내용으로는 ①우리 동지회 명칭을 무등독서회라 칭한다. ②우리는 평소 동지애로 뭉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월 2회의 모임을 갖기로 한다. ③독서운동 전개로 조국 독립 및 쟁취사상 무장과 전통 역사관 확립에 힘쓴다. ④연합군 본국 상륙작전에 호응, 행동대원으로 일제히 봉기할 것을 굳게 다진다.

이들의 행동 강령 가운데 1항부터 3항은 다른 독서회의 활동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4항의 "연합군 본국 상륙작전에 호응, 행동대원으로 일제히 봉기할 것을 굳게 다진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곽이섭 독립유공자의 차남 곽수민 화백이 지난해 광주시교육청에 기증한 독도 그림.

이는 광주사범의 무등독서회 결성이 임시정부와 연결 속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곧 무등독서회는 옥대호가 임시정부 연락원인 김준모, 만주에서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할동하던 옥대호의 친형 옥평호의 지도를 받으며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곧 무등독서회 결성은 조직 당시부터 임시정부와 연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들은 일제 말기 연합군이 본토에 상륙할 때 학생 행동대원들이 일제히 봉기해 일본군 궤멸과 일제 잔재를 소탕하는 전투를 수행하는 학도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해외방송 청취, 임시정부와 연락, 전북, 전남의 사범학교 독립운동 조직과의 연계활동 등을 추진했다.

이들은 이러한 큰 목표 수행을 준비하며 "군국주의는 명망한다", "일본은 물러가라" 등의 삐라와 벽보를 금남로 일대와 일본인 집 곳곳에 부착했다.

1943년 4월 서석동 안동영 집에 모여 임시정부 연락정보원과 접촉하고 '흙', '비족의 무리', '이순신 장군', '이차돈' 등의 책을 탐독하며 회원 사이에 조국의 미래상과 정통 역사관 정립에 힘썼고, 안중근, 이준 열사, 김구 주석 등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계승하려 했다.

특히 그림에 소질이 있는 곽이섭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운동에 대비했다.

곽이섭 선생의 광주사범 졸업 증서.

또한 이들은 1943년 5월 하루 종일 계속되는 광주비행장의 근로 동원을 3개월간이나 기피, 사보타주 활동을 펴왔으며, 교련시간의 혹독한 훈련에 반항하여 운동장에서 구호를 외치며 투쟁했다. 1943년 6월 만주 봉천에 거주하고 있던 임정 연락원 옥평호의 "조국이 해방된다"라는 정보와 연합군 상륙과 동시에 봉기하라는 밀명을 받고, 광주사범학교 학생의 행동복 착용 임박설을 유포하면서 미국의 소리에 나오는 '구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며 행동대원의 요령을 숙지했다.

1943년 전국사범학교 연합 학도대가 회원 홍완표와 홍창기의 노력으로 결성됐다.

앞서 든 전남북 연합학도대 외에 대구사범 본부, 대구상업 지부 등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운동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조직을 확대해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무등독서회는 1944년 10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망타진됐다. 일제는 이 조직이 임시정부와 연결됐다는 점에서 바짝 긴장을 하고 대대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전남·북 경찰부, 광주, 장성, 목포, 나주 경찰서 등 여러 수사기관이 총동원돼 이들을 1945년 8월 15일까지 미결수 상태로 수사하였다. 1945년 8월 16일 풀려난 이들은 다음 학기에 복학하고, 곧 이듬해인 1946년 1월 졸업하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방된 조국에서 교사로 생활하며 대한민국과 전남 교육의 주춧돌이 됐다. 필자는 이들을 광주, 전남교육의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등독서회 활동과 관련하여 안타까운 이가 있다. 광주사범학교 심상과 5학년 홍창기와 관련된 얘기를 잠간 이야기하려 한다. 홍창기는 홍완표와 함께 전·남북을 아우르는 연합 학도대를 결성하려다 홍완표와 함께 체포되어 해주 소년원에 투옥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필자는 위의 책을 집필할 때 그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자세히 정리하지 못했는데 필자가 정리한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2021, 전남교육청 간)에 있는 부친(홍창기)과 무등독서회 얘기를 우연히 들은 그의 아들이 필자를 찾아와 홍창기의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부친은 오병문 전 교육부 장관을 배출한 유명한 광주사범 5회인데, 그동안 일체 활동하지 않은 채 고향에서 사실상 은둔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홍창기는 살핀 바처럼 광주사범 5회 가운데 유일한 무등독서회 회원으로 활동해 온갖 고초를 겪었기에 동기생들 사이에 전설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특히 해방 직후 사범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한국인이 일제 말 민족말살 정책에 앞장 선 교원이었는데 미 군정청의 앞잡이 노릇을 하니 홍창기 등 몇몇이 교장에 항의한 사실도 있었다. 이렇게 민족 독립은 물론 민족의 자존감을 세우는 데 홍창기가 앞섰으니 동문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환갑에 동기들이 순창 시골에 많이 모였다는 것은 이러한 그의 빛나는 삶을 친구들이 기억하고 있었음을 잘 말해준다. 안타깝게도 홍창기는 아직 서훈 사실을 입증받지 못해 미서훈으로 남아 있다. 그의 공적을 길이 빛내게 하는 일 역시 필자의 몫이다. 한편 곽이섭의 아들 곽수민씨는 지난 2022년 광주시교육청에 독도 그림을 기증했다.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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