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은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조훈현·이창호의 사제지간을 그린 영화 '승부'가 대표적이다. 바둑 이야기지만, 삶의 굴곡과 지혜가 녹아있다. 인상 깊었던 건 복기 장면에서다. 승자와 패자가 마주 앉아 이미 둔 바둑을 처음부터 다시 짚는 일이다. 포석·행마·수싸움, 집계산 등 어디서 승패가 갈렸는 지 되새겨보는 과정이다. 조훈현의 뼈를 깎는 재기의 출발점도 복기였다. 그는 책 '고수의 생각법'에서 "아플수록 복기하라"고 했다.
복기는 치열했다. 반상(盤上)에선 창·칼·방패가 무시로 오갔다. 바둑 철학과 상이한 성격이 명징하게 드러나면서다. 특정 한 수를 놓고 스승이 꾸짖었다. 사활을 건 각축전에서 손을 뺀 데 대한 질타였다. "실전에서는 기세가 8할"이라며 싸움 대신 물러섬을 택한 제자를 겨눴다. 반격은 매서웠다. 그 간 스승의 기보를 복기했던 제자는 "물러서면 적어도 반집은 이긴다"고 되받아쳤다. 철저한 계산으로 반집 승부에 강했던 이창호의 바둑은 이 무렵 다져졌다. 반집 승패가 운으로 통했던 때다.
"어떻게 졌는지 알아야" 이세돌의 돌파구
전라남도 신안 비금도 출신인 이세돌을 빼 놓을 수 없다.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 알파고와의 대국 후 복기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바둑은 사람이 인공지능(AI)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영역으로 받아 들여졌다. 무한대에 가까운 경우의 수 때문이다. 형세 판단과 사석 작전 등 다양하고 창의적인 수에 따라 승부가 갈렸다. 세 차례 연거푸 꺾였던 이세돌은 돌파구를 마련했다. "어떻게 졌는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루틴처럼 지켰던 복기를 통해서다. 인류의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 순간인 4국 78수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바둑과 정치(선거)는 닮았다. 우선, 승부가 난다. 바둑은 반집이란 허수를 만들었고, 투표로 갈리는 단판 승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될 수 있는 승부의 세계에서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짚어보는 복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민심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남 탓만 하는 건 악순환만 되풀이 될 뿐, 서로에게 피해만 주기 때문이다. 최근 악재가 연이어 터지고 있는 광주시정이 그렇다.
시정(市政)의 복기는 의사 결정과 선택 과정에 대한 되짚음이다. 현재의 민심 이반의 결과치가 언제 어디서에서부터 기인했는 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타운홀미팅과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원금 논란은 논외로 하자. 예상치 못했던 돌발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관심있게 봤던 건 도시철도 2호선과 호남고속도로 확장, 광주~나주 광역철도 등 시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대중교통 정책이었다. 광주시가 검토하기로 한 '중앙 버스전용차로'도 그 중 하나다. 15년 전 썼던 낡은 취재수첩을 꺼낸 이유다.
실패했던 정책 재추진은 당혹스러웠다. 리더십을 둘러싼 조급함이 읽혀서다. 타운홀미팅 이후 뭔가에 쫓기듯 다급해 보인다는 평가가 많았던 터다. 중앙차로는 2009년 4월, 수완지구 내 하남대로 교차점∼왕버들로 교차점 2.7㎞ 구간(왕복 10차)에서 시행됐다. 예측부터 틀렸다. 수완지구 입주 규모(7만5천여 명)에 맞춰 중앙차로 이용 버스가 시간당 578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턱없는 전망이었다. 임방울대로를 다니는 시내버스는 많을 때도 시간당 28대에 불과했다. 입주자도 5만 명에 그치면서 다니는 버스도 줄었다.
대가는 혹독했다. 전형적인 탁상행정 탓이었다.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채 2년여 만에 사라졌지만, 모두 16억원이 들었다. 버스승강장·중앙분리대·안전시설 설치 비용 등으로 들어간 돈만 8억원. 중앙차로를 없애고 원래 도로로 복원하는 데 또 8억원이 들었다. 처음부터 엉터리 계획에 맞추다 보니, 중앙차로는 세금만 낭비하고 무용지물이 됐던 셈이다.
리더십 흔들리면 운영 동력 상실
바둑과 정치 모두 장막 안에서 천리를 내다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선수(先手)다. 바둑에서 고수끼리 맞붙었을 땐 후수만 둬서는 승리가 힘들다. 선거란 단판 승부도 마찬가지다. 광주시를 둘러싼 잇단 논란의 이면에도 치열한 물밑 수싸움이 자리하고 있다. 내년 6월 광주광역시장 선거란 바둑판에서 선수를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는 전제에서다.
선수에 대한 조급함은 무리수를 낳을 수 있다. '한 판에 묘수 세 번 나오면 진다'는 바둑 격언이 있다. 잇단 임기응변식 대처가 승패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다. 여기에 얽힌 스승과 제자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죠와 명인은 세 번의 묘수를 써서 이겼다. 당시 대결을 복기하던 죠와에게 가장 어린 제자가 비판했다. 초반 착수를 잘못해 위기를 자초했다는 거다. 포석을 제대로 했으면 묘수를 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내☆일이 빛나는 기회도시 광주'. 강기정 시장이 2022년 취임할 때 공개한 슬로건이다. 강 시장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등일보 등이 실시한 최근 여론조사에서 경쟁 후보에 고전했다. 쫓는 입장에선 어떻게든 판을 흔들어 선수를 되찾아야 한다. 이른바 '이슈의 선점'. 문제는 시장의 리더십이 흔들리면 시정 운영 동력이 상실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민선 8기에 대한 복기가 필요한 때다. 정권교체와 AI·관세 전쟁 등 21세기 급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1년 여의 시간은 광주의 미래와 운명을 바꾸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광주시민들의 마음을 얻는 일'은 그 다음이다.
유지호 디지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