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청년희망보고서⑮] 도민주 연출가
'광주'라는 지역을 소재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을 연출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뭘까?'라는 물음에 답은 늘 '광주'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창작그룹 MOIZ'(이하 모이즈)에서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도민주(29)씨의 전언이다. 그는 광주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대학교까지 다닌 소위 말해 '광주 토박이'다. 미우나 고우나 광주라는 지역 안에서 20여년을 살아온 탓에 그에게 광주는 누구보다 가깝고 잘 아는 소재였다. 동시에 그만큼 이야기하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했다.
'서울-지방'의 이항대립적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 광주에도 서울 못지않게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음을 말하기 위해 지역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자신 있게 밝힌 도 연출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비전공자가 예술을 '업'으로 삼기까지
커뮤니티 퍼포먼스부터 장소이동형 공연, 다큐멘터리 연극, 장소특정형 전시, 이머시브 시어터, 커뮤니티 퍼포먼스….
도 연출가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장르 작품들을 두루 연출한 탓에 근본 '예술인'으로 오해 받는다. 그보다는 '어쩌다 예술인'이 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의사를 꿈꾸며 대학도 생명과학을 전공하기까지 한, 어쩌면 예술인과 정반대의 길을 걸을 뻔했다.
그가 예술계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대학에 진학한 후 캠퍼스를 걷다 마주한 연극동아리 인원모집 포스터를 보면서 시작됐다.
"대학에 가면 뭐든 할 수 있고, 재미있는 일들 투성이다"라는 말만 믿고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지만, 늘 반복되는 강의식 교육에 넌더리 나는 날들이 이어지던 중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달콤한(?) 유혹을 건네는 포스터를 마주한 것이다.
그는 "가장 대학생(?)스러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며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연극의 A부터 Z까지 알게 됐다. 연극이 만들어지기까지 연출, 디자이너, 감독, 스태프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연출가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임을 알게 된 그는 2018년,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2030 문화 예술인들과 함께 직접 뮤지컬이나 연극을 만드는 창작그룹 모이즈를 결성하게 된다.
그는 "그룹 결성 당시 광주에는 창작 뮤지컬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저와 같은 나이대의 예술인들은 극단의 막내로 들어가 하고 싶은 작업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며 "'시작하면 뭐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한 명은 대본을, 한 명은 음악을, 다른 한 명은 무대를 디자인 하는 등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삶의 터전, 광주에 대해 말하다
그룹을 결성했다고 해서 모든 준비가 끝난 건 아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직접 무대를 연출해 선보이겠노라 다짐했던 도 연출가와 모이즈 멤버들이지만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늘 이어졌다. 그룹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해야 했다.
도 연출가를 비롯한 모이즈 멤버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바로 '광주 토박이'라는 것.
도 연출가는 "예전에 한 연출가 분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유명한 극단에 들어가지마라. 너만의 작품을 하라'는 것이었다"면서 "제가 잘 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아는 건 인생의 대부분을 지내온 '광주'라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광주에서 광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웃음지어 보였다.
물론 기준도 있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광주의 지역성은 단지 5·18민주화운동이나 정율성음악축제와 같은 역사성, 향토성만을 기반으로 하는 건 아니었다. 광주에서 살면서 느껴온 일상의 불편함과 이상함과 같은 사소한 물음에서 작품을 시작하곤 했다.
특히 마침표로 끝나는 작품이 아닌 관객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지역과 관련해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아울러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항대립적 구조를 깨고 싶어했던 도 연출가의 울분도 이유로 작용했다.
그는 "광주랑, 대구, 부산 모두 너무나 다른데도 불구하고 지방으로 한 데 묶여 '지방은 살기 힘든 곳'이라는 프레임으로 소비되는 것이 싫었다"며 "특히 우리 터전인 광주에 서울 못지 않게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만의 방법
광주의 모든 사람들은 5·18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직접 경험한 세대는 물론 이후 세대도 부모를 통해 혹은 교과서를 통해, 추모 공간 등 현장학습을 통해 5·18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즉, 5·18은 광주 사람들의 공동 기억이며, 도시 정체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상 소위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5·18은 공감보다는 인식에 불과하고 다소 감정적 피로감을 유발하는 위험한 소재이기도 하다.
도 연출가는 '우리는 정말 5·18을 알고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안고 이와 관련한 여러 작품을 준비했다.
다큐멘터리 연극 장르로 연출한 '미래기념비 탐사대'가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5·18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광주에 사는 청년들이 기억하고 바라보는 5·18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문 배우가 아닌 모이즈 멤버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5·18의 역사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창작자로서, 광주의 20대로서, 5·18을 기억해야 하는 '미래 세대'로서 현재 광주에서 마주치는 5·18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저 '주먹밥, 시민군, 총, 계엄군, 대동정신'으로 키워드화되는 5·18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릴 적 5·18 관련 행사에 참여해 느꼈던 감정' 등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오월은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이야기임을 알린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타자화 된 5·18의 현주소도 마주보게 한다.
도 연출가는 "5·18하면 주먹밥, 대동정신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런 표상은 만질 수 없고 감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념비와 다름 없었다"면서 "당시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준비한 작품인 만큼 5·18에 대한 기억의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20대 광주 청년으로서 5·18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을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성공' 공식은 그만
도 연출가는 그동안 연출했던 작품 중 수도권으로 떠나려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커뮤니티 퍼포먼스 장르 작품인 '상상서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역시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인 탓에 늘 스스로에게 '탈광주-인서울'만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그는 왜 지역 청년들이 서울을 꿈꾸는지, 그들이 꿈꾸는 서울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 공개모집을 통해 지역에서 살아가는 비전문 연기자들을 모아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는 서울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명 '수다회'와 같은 작품 '상상서울'을 연출하게 됐다.
그는 "최근 들어 지역 청년의 수도권 이주에 관한 정책 보고서가 쏟아져 나왔고, 탈지역에 대한 포럼도 무수히 열렸지만 이런 공론장에 호명되는 청년들은 대부분 시민단체의 대표이거나 협회의 장이었다"며 "어디서든 볼 법한 지역 청년들의 다양한 삶과 언어를 모으고 싶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지역 청년들이 원하고 바라는 지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을 연출하며 오히려 광주의 가능성과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에 출연한 지역 청년들이 상상하는 서울의 모습을 광주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지 역으로 생각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광주에서의 살길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도 연출가는 "'상상서울'은 그야말로 내가 바라는 나의 미래와 이를 위해 필요한 도시의 모습을 서울이라는 공간에 투영한 것"이라며 "각자의 상상서울을 말해보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도시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며 광주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타 지역의 청년들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광주 안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전남 등 타 지역의 청년들을 흡수해 오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지자체가 지역 청년들 위한 청년정책을 계속해서 발굴하고는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포함되지 않는 등 '양산형 정책'에 불과하다"면서 "지역 청년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건 '정치효능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말을 하면 반영이 되는 등 효능감이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 평범한 청년들이 말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 상상서울이 아닌 상상광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이예지기자 foresigh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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