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
소년 범죄를 다룬 드라마 ‘소년심판’의 주인공 심은석 판사가 내뱉은 이 서늘한 고백은, 온정주의에 빠져있던 우리 사회에 매서운 일침을 가한다. 소년 사건을 전담하는 판사가 왜 그토록 그들을 혐오했을까? 단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오만함, 법의 보호를 악용해 피해자를 기만하는 영악함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교묘히 회피한 채, 개인의 인권과 권리만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기조가 팽배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병폐는 우리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보호’는 아이들에게 완벽한 면죄부가 됐고,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도 책임지지 않는 괴물들을 만들어냈다. 14세에서 13세로 상한 연령을 낮추는 단편적인 미봉책으로는 이 비극을 멈출 수 없다. 이제는 촉법소년 제도 자체를 전면 폐지해야 할 때다.
실제 현실 속 미성년자들의 범죄 현장은 처참할 정도로 법을 조롱하고 있다. 훔친 렌터카로 무면허 운전을 하다 사망 사고를 내고도 출동한 경찰에게 “우리는 촉법소년이라 감옥에 가지 않는다”며 당당히 웃음 짓는 십 대들의 모습은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겼다. 동급생을 모텔로 끌고 가 잔혹하게 집단 폭행하며 그 과정을 소셜미디어에 중계하는 가해자들은 “어차피 소년원 몇 달 다녀오면 끝”이라며 공권력을 짓밟는다. 초등학생이 흉기로 동급생의 생명을 앗아가고, 대형 백화점에 폭발물 설치 협박 글을 올려 수십억 원의 막대한 피해를 주어도 이들에게는 전과 기록조차 남지 않는다. 법의 따뜻한 보호 취지가 영악한 범죄자들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돼버린 것이다.
물론 제도 폐지에 강력히 반대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아동의 뇌 발달 단계상 충동 조절 능력이 미숙하며, 어린 나이에 형벌을 가하면 전과자라는 낙인효과와 교도소에서 오히려 범죄를 배우는 범죄학교 효과로 재범률이 높아진다는 우려다. 엄벌보다는 따뜻한 교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대법원 통계 등 매년 폭발적으로 치솟는 촉법소년의 강력범죄율이 그들의 주장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증명한다.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제도의 허점을 정확히 학습한 솜방망이 처벌의 결과물이다. 반면 영국은 형사책임 연령을 만 10세로 엄격히 제한하고, 미국은 절반 이상의 주에서 살인 등 흉악 범죄 앞에서는 나이 제한 없이 성인과 동일하게 처벌하고 있다. 범죄의 잔혹성에 나이라는 필터를 씌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를 폐지한 이후,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가르쳐야죠. 사람을 해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드라마 속 또 다른 명대사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다.
촉법소년 제도의 폐지가 모든 아이를 성인 교도소에 밀어 넣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기계적인 면책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되, 사법부의 유연한 판단과 교정 시스템의 입체적 이원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안이 가벼운 생계형 초범이나 단순 일탈은 현행처럼 보호관찰과 심리 치료 중심의 선도 프로그램으로 갱생의 기회를 주면 된다. 반면 고의적이고 잔혹한 흉악 범죄 앞에서는 나이와 무관하게 형사 재판에 넘겨 합당한 형벌을 내리는 ‘예외적 형사소추 제도’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아울러 강력 범죄 소년범을 수용하기 위해 성인 범죄자와 철저히 분리된 ‘고위험 소년범 전용 중경비 교정시설’의 신설이 시급하다. 이곳에서 현행보다 훨씬 강력한 물리적 통제와 규율을 적용해 근본적인 행동 교정을 끌어내야 한다.
가해자의 인권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피눈물을 흘리는 피해자를 외면하는 국가는 존재 가치가 없다. 타인의 일상을 처참히 무너뜨리고도 권리만 주장하며 미소 짓는 이들에게 무조건적인 보호란 성립할 수 없다.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에게 우리가 해주어야 할 진짜 교화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자유와 행동에는 반드시 준엄한 대가가 따른다는 세상의 규칙을 똑똑히 가르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