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과 동시 일 회사 수매···조면공장 거쳐 일본으로

이용규 기자
업데이트 2026.09.21. 18:29
1부.4. 목화는 어디로 갔나
목포에 25곳 운영 씨와 솜 분리
목포의눈물 이난영도 공장 경험
목포항, 70~80% 반출 유통 관문
1935년이후 광주 공장으로 집결
저임금·환경열악 노동자엔 지옥

왼쪽에서부터 아오노 가구점(현 충장로2가 25번지), 후지모토 시계점(충장로2가 26번지), 가가야 문구점(충장로3가 16번지) 등이 보인다.

남도 들판을 뒤덮은 목화는 수확과 동시에 농민들의 손을 떠났다. 목화는 일본계 회사의 수매망을 거쳐 조면공장으로 모였다. 수확한 목화는 조면공장으로 옮겨져 씨와 섬유를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면은 목포항을 통해 대량 반출됐다.

조면공장은 남도의 목화밭과 일본 방직공장을 연결하는 첫 번째 산업시설이었다. 영산강 유역을 따라 집중 재배된 목화는 호남선 철도와 영산강 수운을 따라 목포에 모였다. 목포에는 목화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조면공장들이 많았다. 1906년 일본 오사카에 본사를 둔 한국면화주식회사가 목포에 조면공장 지점을 설치했다. 목화 수매권을 쥐고 성장을 거듭한 이 회사는 조선면화주식회사의 토대가 됐다. 또한 미쓰이 재벌 계열의 남북면업, 일본계 회사인 천평면엽과 목포면업, 문재철 등 한국인이 투자한 조면공장이 있었다. 중소규모의 조면공장들도 목포에 들어섰다. 1924년 전라남도 전남면화 보고서에는 당시 전남에서 가동 중인 조면공장은 25개였고 모두 목포에 있었다. 조면산업은 일본 조면회사들이 목화 수매권을 갖고 주도권을 쥐었다. 한국인들은 중소업체를 운영했다.

식민지 조면산업의 이면에는 여성 저임금 노동이 자리 잡고 있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도 10대 중반에 조선면화조면공장에서 일했다. 동력기계가 고속으로 가동돼는 조면공장은 매우 위험했다. 노동자들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0년 1월13일, 12월19일자에는 ‘18세 독자가 기계에 감겨 참사, 목포조면공장직공 1명 참사’ 등 사건을 각각 보도했다.

조면공장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이러한 노동조건에도 대우는 너무 열악했다. 당시 이난영이 하루 일당으로 받은 돈은 쌀 200㎖를 살 수 있는 액수에 불과했다, 커피 머그컵이 250㎖임을 감안할 경우 얼마나 헐값 노동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이 일당으로 목포에서 쌀 10㎏을 구입하기 위해선 두 달 넘겨 일을 해야 가능했다. 조면공장에서는 목화씨를 걸러내고 부피를 가볍게 해서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이 주요 공정이었다. 목화와 무명베 집산지로 유명한 남평에도 1917년 조면공장이 설치됐다. 1920년대 국내 반출 목화의 70~80%가 목포항을 거쳤다는 통계는 목포가 식민지 면화 유통의 관문이었음을 보여준다.

1937년 일만면화협회 조선지부에서 발행한 조선면화사정에 따르면 1935년 목포항에서 나간 목화는 조면기준으로 6천349t이었다. 티셔츠 1장을 만드는데 원면 약 180g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약 3천500만장을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이 숫자는 호남일대의 농민들이 헐값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생산한 피땀의 결실이 일본 본토 등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1935년은 광주 임동에 종연방적의 대규모 방직공장이 들어서 본격적인 조업에 나선 해였다. 이 무렵 설립한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미국과 인도에서 원면을 들여왔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전남이 전국적인 면화산지였는데도 왜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인도와 미국산 원면을 들여왔을까.

답은 공장의 규모에 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당시 생산시설 규모가 조선의 방직공장중 최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연간 필요한 목화만 1천800만근, 약 1만1천t에 달하도록 설계됐다. 당시 전남에서 생산되는 목화만으로는 공장을 연중 가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종연방적은 미국과 인도 등지에서 원면을 들여왔고 공장 내부에는 수입 원면을 보관 관리하는 보세창고까지 마련했다.

목포에만 조면공장이 생긴게 아니라 광주에서도 조면공장이 활발하게 가동했다. 1913년 광주교 근처에 도모타 조면공장, 1914년 광주대교 일대에 광주조면공장이 각각 설립됐다. 조면공장은 광주에서 양조장과 함께 가장 먼저 생긴 근대식 공장이었다. 당시 조면공장은 광주의 제조업체 규모 중 최대였다. 이 무렵 광주농공은행의 자본금이 20만원일 때 광주조면공장은 30만원에 육박했다. 광주조면공장 회계 재정은 목화산업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가늠자이다.

이처럼 초기 남도 목화산업의 역할은 원료공급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는 광주에 대규모 방직시설이 들어서면서 산업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료를 밖으로 내보던 도시에서 실과 직물을 직접 생산하는 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1937년 광산군 석곡면 금곡리 문기범에게 광산군 농회에서 수여한 표창장. 육지면 증산 장려를 위해 공동 경작 조합 지도 계발에 힘쓴 공로를 치하한다는 내용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종연방적 임동공장과 민족 자본계열 기업인 무등양말 등을 통해 면제품 생산시설이 세워졌다. 크고 작은 섬유관련 회사들의 활발한 창업으로 인해 광주는 서울·부산·평양 등과 함께 전국 상위권에 속하는 면방산업도시로서 자리매김했다.

종연방적에서 생산된 면제품은 전남지역 새 상권 형성의 촉매제였다. 종연방적에서 면제품 생산이 늘면서 기존 광주의 포목상권도 더욱 성장했다. 충장로 4, 5가에는 포목점들이 밀집했고, 이후 광주의 대표적인 상업축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충장로는 지금도 비단의 거리 명맥을 지키고 있다.

적산처리과정에서 민간인에게 불하된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전남방직으로 재탄생했다.

이를 기반으로 설립된 전방과 일신방직은 1980년때까지 한국의 섬유산업을 이끌었다. 이와 별도로 광주에는 조면업체, 면사, 메리야스, 면장갑 면작물 등을 생산하는 많은 중소업체들이 번창했다. 70년~80년대까지 한국수출의 효자상품으로서 지역경제를 견인했다.

남도 들판의 목화를 일본으로 보내던 식민지 원료공급구조는 1930년대 광주에 대규모 방직공장이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광주는 원료를 생산해 보내던 곳에서 실과 작물을 만드는 생산도시로 변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수탈을 위해 형성된 공장과 기술, 유통망은 해방 이후 한국인 노동자와 기업에 의해 재편됐고 이후 광주 섬유산업을 떠받치는 산업기반이 됐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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