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정치보복 근절 실천했지만, 그들은 사죄 없이 떠났다

입력 2023.11.19. 19:49
2024연중기획 탄생100년 DJ를 그리다
1부-김대중과 통합정치
①용서·화해 정신과 국민통합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인 정치보복 근절을 실천했지만, 반성하지 않는 자들은 사죄없이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목포에서 열린 ‘김대중 평화회의’. 무등일보DB

1980년 육군본부 군사 재판정서

마지막 유언으로 남겼던 신념 지켜

모진 고문에 평생 고통 큰아들 홍일

뼛속 아픔 딛고 전두환·노태우 사면

박정희기념관 건립도 직접 실행해

박근혜 감사에 "응어리 풀려" 술회

'반성 않는' 全 예우는 냉정한 인식

용서 철학 정치에 접목 통합 기여를


2024연중기획 탄생100년 DJ를 그리다 1부-김대중과 통합정치 ①용서·화해 정신과 국민통합

'정치 실종시대'란 비판이 고조하면서 통합과 개혁을 실천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 시기다. 이에 무등일보는 지난 10월10일 창간 35주년 기념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는 연중기획 '김대중을 그리다'의 프롤로그를 게재한 바 있다. 내년 김대중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이 시리즈는 프롤로그만 2회에 거쳐 게재했다. 이어 무등일보는 1부 '김대중과 통합 정치'를 시작으로 '김대중을 그리다' 기획 연재를 본격화한다. 모두 5회로 예정된 1부 연재가 끝나면 2부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의 개혁'편, 3부 '김대중과 호남'편, 4부 '해외에선 최고 평가 받는 김대중'편을 차례로 연재할 계획이다. 무등일보의 장기 연재기획 '김대중을 그리다'에 대한 많은 관심을 바란다.

◆전두환에 대한 용서

1997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그보다 2년 앞선 1995년 전두환과 신군부 핵심인사들은 내란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 선거 직후 정권 교체기를 맞아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됐다.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퇴임 전 두 전직 대통령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국민 여론은 찬·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게다가 대통령 당선자는 전두환이 사형을 시키려 했던 김대중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은 김대중 당선자의 동의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국민의 시선이 김대중 당선자에게 집중됐다. 김대중이 사면·복권에 동의하면 광주시민들을 비롯해 민주진영에서 비난이 쇄도할 게 뻔했다. 반면 사면·복권에 반대할 경우 보수진영에서는 김대중이 정치보복에 나섰다고 비난할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어떤 선택을 하든 일정한 비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김대중 당선자는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에 동의했다. 이 선택은 결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정치보복 근절이라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김대중은 1980년 9월 13일 육군본부 군사 재판정에서 그와 함께 구속된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최후진술을 했었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인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큰아들 김홍일은 1980년 김대중이 체포되었을 때 함께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는 혹시라도 고문에 굴복해 아버지에게 불리한 발언이라고 할까 두려워 감옥에서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는 15~17대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고 파킨슨병을 앓아 마지막 15년 동안은 거의 거동을 하지 못했다. 김대중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뼛속까지 아파했다.

김대중은 그런 안타까움 마음을 측근인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결국, 나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 아들들, 특히 우리 큰아들 홍일이를 보면 가슴이 미어져서 살 수가 없어요."

그런 아픈 사연을 이겨내며 김대중 당선자는 전두환을 용서하기로 했다. 17년 전인 1980년 행한 그의 유언 같은 약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김대중이 전두환의 사면 복권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것을 정치보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두환은 그가 저지른 광주학살과 부정축재로 인해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문제는 그런 합리적 논리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문제는 감정과 진영 대립의 문제였다. 특히 김대중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랬다.

김대중 당선자가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에 동의하면서 전두환·노태우는 12월 22일 감옥에서 풀려났다. "관록을 갖추고 믿음직한 김대중 당선자가 당선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두환이 석방하면서 밝힌 말이다.

광주시민을 비롯해 민주진영에서 전두환의 석방과 사면·복권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당선되자마자 그를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의 뜻과 배치되는 결정을 해야 하는 김대중의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복권에 동의한 것은 앞으로 더 이상의 정치보복이나 지역적 대립은 없어야 한다는 자신의 염원이 담긴 조치라면서 반대자들의 이해를 구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박정희와 화해

김대중의 용서 철학은 전두환 등 신군부에게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측근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께서 이 부장께 외국에 나갈 생각 말고 국내에서 편하게 지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락에게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이후락은 1973년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으면서 김대중을 동경에서 납치해 바다에 수장시키려 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이후락에 대한 용서는 곧 박정희에 대한 용서였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와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 사이에 단일화 협상이 진행됐다. 양측은 김대중을 단일 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 임기 중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종필은 이때 김대중에게 단일화 조건으로 내각제 개헌 외에 박정희기념관 건립 요청을 했다. 김대중은 김종필의 요구에 동의했다. 김종필은 자신이 김대중에게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요구하고 김대중이 동의한 것을 "인격과 신뢰에 바탕을 한 역사의 '해원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후 실제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200억 원을 지원했고 박정희기념사업회 고문도 맡았다. 그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이 박정희에 대한 공과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김종필은 그의 회고록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은 김종필이 1992년 김영삼을 지원할 때도 반대급부로 약속받은 사안이었으나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후 약속을 지키지 않은 반면에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중 200억 원을 책정해 기념관 건축공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김대중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인 2004년 8월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도서관을 찾아왔다. 박근혜는 이때 김대중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으시고, 고생한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린다. 재임 중 기념관 문제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에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매우 기뻤고, 아버지의 잘못을 사과한 박근혜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내 속에 있는 무슨 응어리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라고 술회했다. 그는 "아버지 시대 맺혔던 원한을 따님이 와서 풀고 한 것에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2006년 3월 21일 박정희가 세운 영남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대중은 당시 몸이 불편해 국내외 여러 대학의 강연이나 명예박사학위 수여 요청을 사절하고 있었는데 영남대학교의 요청만큼은 수락했다. 박정희와 영남대학교 사이의 특별한 인연을 생각해서였다. 대구 지역에서 발행하는 '매일신문' 은 김대중이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대중과 박정희의 사진을 나란히 싣고 '박통-DJ 서로 끌어안다'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상징적 화해를 소개했다.

김대중 비서관을 지낸 국회의원 최경환은 그의 책 '김대중 리더십'에서 이날의 모습을 가리켜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고 표현했다. 김대중의 이런 행위는 일정 부분 정치적 제스처의 성격도 지녔겠지만, 훗날 전두환을 용서한 것까지를 고려할 때 그가 강조한 화해와 용서 철학을 몸소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용서와 역사바로세우기의 경계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5개월이 지난 1998년 7월 31일 전직 대통령들 내외를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 모두가 참석했다.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모두가 청와대에서 현직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한 것은 우리 헌정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이후에도 외국 출장 등을 갔다 오면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정상회담 결과나 주요 국정 현안을 보고했다. 이 경우 김영삼은 불참해도 전두환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경우 대통령 테이블에서는 전두환이, 배우자 테이블에서는 이순자가 대화를 가장 유쾌하게 이끌었다.

"청와대에 가서 대접 잘 받고 왔습니다."

전두환이 청와대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었다. 주변에서 수군덕거렸다.

"낯이 참 두꺼운 사람이다. 자기가 죽이려고 한 사람이 저렇게 성의를 다해 대우를 해주면 자신도 과거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반성 같은 것을 조금은 할만도 한데."

김대중이 전두환·노태우 등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사면·복권 요청에 동의한 것은 그의 용서 철학 및 당시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수의 국민들도 그의 선택을 이해했다고 본다.

그러나 전두환은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12·12 쿠데타나 광주학살 행위에 대해 진심은커녕 형식적으로도 사과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전두환은 5·18 때 북한군이 내려와 '광주사태'를 격화시켰다고 했다. 그의 이런 뻔뻔스러운 행위 때문에 김대중이 용서와 국민통합 차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용서한 것도 그 의미가 반감됐다.

전두환의 사례처럼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자에게 사면·복권의 차원을 넘어서 그를 청와대로 초청하고 전직 대통령으로 깍듯이 예우한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냉정한 토론이 필요할 것 같다. 지도자의 '정치적 관용'이 반민족·반민주세력의 뿌리를 온존시킴으로써 이들이 다시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짓밟고, 정의와 진리의 가치를 전도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관용의 문제를 넘어서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을 사면·복권시킨 차원을 넘어서, 그를 전직 대통령으로 깍듯이 예우한 행위는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와 화해하면서 그의 공과를 균형적 시각에서 조명하기를 바랐듯이, 김대중의 용서·화해와 국민통합 철학도 그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균형있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평가와는 별개로,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 역사에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정적까지 용서한 대통령이 있는데, 우리 정치는 증오와 미움, 보복의 정치를 오히려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나쁜 정치에 대한 응징은 물론이요 좋은 정치의 실천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강조했던 '행동하는 양심'에 해당한다. 김대중의 용서 철학이 우리 정치에 접목돼 여야 간의 극단적 대립과 분열이 완화되고 국민통합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최영태 전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최영태 교수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전남대에서 5.18연구소장, 교무처장,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시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해 광주흥사단과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광주도시철도 2호선공론화위원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독일통일의 3단계 전개과정',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등이 있다.

# 연관뉴스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

지방정치 주요뉴스
댓글2
0/300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