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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고비 마다 길을 밝혀준 선구자들의 고향

입력 2022.05.26. 19:11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
④달빛철도 출발역 광산구가 낳은 인물들
남도 정신의 뿌리 고봉 기대승
'쑥대머리' 스타 국창 임방울
암흑기 서정 노래한 시인 박용철
민주주의 위해 몸 불태운 윤상원
달빛철도가 잇는 소중한 인연들
호남 정신의 최고봉 고봉 기대승을 만날수 있는 월봉서원

일찍이 광산구는 위대한 인물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시대를 꿰뚫는 위대한 사상가가 있는가 하면 한 시대를 풍미한 판소리 음악가, 의병장, 문인, 5.18 민주투사까지 광산이 배출한 인물은 넓고 다양해 우리 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광산의 인물에게서 시대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우리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삶의 용기와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조선 선비의 사표 '고봉 기대승'

광산구 광산동 월봉서원에 들어서면 16세기 조선 최고 지성 고봉 기대승을 만날 수 있다. 16세기는 한국 지성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의 시기다. 율곡 이이와 그의 스승 퇴계 이황, 그리고 또 하나의 걸출한 인물 고봉 기대승등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기였다.

퇴계는 기대승을 통유라 했다. 온 세상 이치를 통달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정조는 기대승을 "호남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고 대놓고 평할 정도였다.

고봉 기대승은 1527년(중종 22년) 광산구 임곡관내 신룡동에서 학자 기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예법과 산수(算數)에 뛰어났다. 그의 총명함으로 조선조 임금들의 멘토였고 당대 최고의 지성 이황과 시대를 초월한 우정과 사상을 논할 정도로 사유가 깊었다.

고봉과 퇴계의 만남은 극적이다. 1558년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은 당시 성균관 대사성인 이황을 찾아가 그의 학설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른바 사단칠정론의 탄생이었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일곱가지 마음과 감정을 해석하는 논쟁이었다. 그들의 논쟁은 무려 8년간 서찰 교환으로 이어진다.

퇴계 이황이 고봉 기대승보다 나이가 26세나 연장자이다 보니 이황이 지금으로 보면 스승격이다. 그러나 13년간 지속된 사상 논쟁은 세대를 뛰어넘는 사상의 거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도량과 관대함이 숨겨져 있다. 이황의 세대를 뛰어넘는 큰 도량과 고봉의 뛰어난 사물인식이 만나 시대를 뛰어넘는 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들의 논쟁은 자리와 나이를 뛰어넘는 사상 논쟁으로 우리 시대 지식인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 온다.

고봉의 애민 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곳이 월봉서원이다. 빙월당은 기대승 사상을 배우던 공간이다. 정조가 하사한 '빙심설월' 현판은 기대승의 인물됨을 짐작케 한다. 빙심설월은 '눈 내리는 달밤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이라는 뜻으로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선비 서릿발 같은 지조를 느끼게 한다. 월봉서원은 호남 정신을 배우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1572년 고봉은 46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애민사상과 인본주의 정신만은 남도 정신의 뿌리로 굳건히 그 명맥을 유지한다.


◆조선 최고 판소리 스타 '국창 임방울'

광산이 낳은 최고 문화 상품을 고르라면 첫번째로 뽑힐 인물이 조선 최고 판소리스타 국창 임방울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민가수다. 임방울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905년 광산구 도산동 수성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임승근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울지 않고 방울 방울 잘 논다해서 애칭으로 불리던 이름 방울이 예명이 됐다고 한다.

국창 임방울

국창 임방울은 일제 강점기가 낳은 조선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열 살 무렵 박재실 문하에서 판소리를 수학한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득음의 경지를 열었지만 재주를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의 나이 스물 다섯에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조선명창연주회에 참여하면서 임방울은 쑥대머리 한소절로 단숨에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의 쑥대머리는 나라 잃은 설움과 춘향의 처지가 빗대지면서 거대한 설움의 서사시로 번져 나갔다. 상실감으로 치떨던 조선 민중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당시 원각사에서 펼쳐진 영상을 보면 임방울이 얼마나 대단한 소리꾼이었는지 짐작케한다.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12만장의 음반이 팔렸다니 그의 소리가 얼마나 대중에게 다가갔는지 능히 짐작케한다. 마음 둘 곳 없던 민중들에게 임방울의 소리는 조선독립의 외침이자 나라를 되찾겠다는 절절한 희망가였던 셈이다.

임방울기념비,송정공원

그가 광산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광산은 호남 의병활동에서도 거점 역할을 하던 곳이다. 임방울의 소리는 음악으로 저항했던 독립운동이었다. 최초 판소리 대중스타 1호 임방울은 "소리 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다"고 유언하듯 말한다. 극의 죽음도 극적이었다. 1961년 3월 전북 김제 장터에서 소리 하다 쓰러져 58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임방울 장례, 국악예술인장,서울,1961

광산구가 나은 불세출의 판소리 스타 임방울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임방울 국악제를 열어 재능 있는 소리꾼을 발굴하고 있다. 지하철 1호선 송정리역사에는 그를 기념하는 전시관이 있어 생애와 업적,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송정공원에는 임방울 기념탑도 세워져 있다.


◆암흑시 서정을 노래한 젊은 시인 박용철

나두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는다/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두야 간다박용철 '떠나가는배'

광산구가 낳은 서정시인 용아 박용철(1904-1938)을 이해하는데 '떠나가는 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는다"는 다른 시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감각적 표현들이다. 용아는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 상황을 뚫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식민지 시대 젊은 시인의 용기가 가상하다. 정박지를 찾아 떠나는 배는 용아의 인생배이기도 하다.

용아 박용철 생가에서 열린 '시인의사계'

용아 박용철은 암흑기의 시대를 관통하는 서정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는 1904년 광산구 송정읍 솔머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강진의 김영랑과 교유하며 당대 최고 서정 시인으로 이름을 올린다. 1930년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지'를 만들어 우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사람들은 시인 박용철은 몰라도 가수 김수철의 노래 '나도야 간다'는 안다. 35세로 요절한 용아는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밤',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 주옥 같은 서정시를 발표한 광산이 낳은 천재 시인이었다. 광주 공원에 '떠나가는 배'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 광주시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에는 용아 생가터가 잘 보존돼 있다. 광산구는 '용아 문학제'를 열어 후학을 길러내고 용아를 기리고 있다. 소촌로 정갈한 용아 생가 초가집 툇마루에 걸터 앉아 식민지 청년의 괴로운 자화상을 보는 것도 달빛철도가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5·18 최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5·18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다. 광산구의 젊은 청년 윤상원은 현대사 비극의 현장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했다. 1980년 5월 27일 5·18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무력 진압할 때까지 항쟁지도부의 입노릇을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에는 '최후의 시민군 대변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윤상원열사

도청이 진압되기 하루전 윤상원은 외신기자들 앞에서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면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당당히 선언한 인물이다. 27일 새벽 도청에 남아있는 학생들을 미리 대피 시키고 자신은 장렬히 최후를 맞는다. 윤상원의 나이 29세였다.

5·18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산자의 빚으로 남았다.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것을 꿈꾼 한 청년은 갔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살아 숨 쉰다.

윤상원생가

광주시 광산구 천동길 46에는 고 윤상원의 생가가 있다. 마을 입구에는 영혼 결혼식을 올린 윤상원과 박기순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피리 부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열사를 기리는 글과 그림을 따라 100m쯤 들어가면 윤열사의 생가와 추모관이 나온다. 윤상원 열사의 호인 해파 (海波)에서 따온 해파제에는 윤열사의 사상과 활약상을 엿볼수 있는 '투사회보'등이 남아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주주의를 위해 한 몸 불태운 젊은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달빛 철도가 연결해준 소중한 인연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이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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