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다시 열린 관 안에서는 관 크기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유골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80년 5·18 민주화운동이 끝난 직후인 6월7일 광주 남구 효덕동 야산에서 묻혀 있다 발견된 유해다.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이 어린이가 어디 사는 누구이고 나이는 몇 살인지는 지금까지도 알 길이 없다. 신원을 알 수 없어 망월동 구묘역에 이름 없이 안장됐다가 2002년 국립 5·18민주묘지로 이장된 이들은 '무명 열사'다.
안타까운 이들 무명 열사의 유골이 유가족들의 품에 안기게 될 수 있을지, 그 결과는 빠르면 5·18 40주년인 올해 안으로 나올 수 있다.
19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진행하는 분묘 개장식이 진행됐다.
조사위는 이날 하루 무명 열사 가운데 1번, 3번, 5번 열사의 묘를 개장했다. 무명 열사들은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졌지만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던 이들로, 현재까지 6명의 신원이 확인되고 5명이 남았다.
무명 열사들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쓰이는 유전자 시료의 기존에 확보한 분량이 소진되면서, 조사위는 첫 현장 조사 차원에서 광주를 찾아 무명 열사들의 관을 열고 유골에서 다시 시료를 채취했다.
앞서 지난 2002년 진행된 감식 결과에 따르면 무명 열사 1번은 4세 쯤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로, 총상으로 숨진 뒤 남구 효덕동 야산에 묻혀 있다 80년 6월7일 발견됐다. 2번은 16세 전후로 추정되며 복부를 총탄에 관통당했다. 3번은 20대 초반으로 파란색의 광주숭의실업고 체육복 상의와 교련복 바지를 입었다.
4번은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며 4~5개의 철사가 유해에서 발견됐는데 법의학자들은 척추 수술의 잔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5번은 5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으로 왼쪽 팔에는 1970년대 프랑스 브랜드의 시계를 찼는데 시계줄은 국산 '오리엔트' 제품이었다.
이처럼 아직까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포함한 5·18 당시 행방불명자는 78명이다.
78명 행방불명자 중에는 10대 미만의 어린이가 두 명인데 실종 당시 5살이던 박광진군과 7살이던 이창현군이다. 5월 단체는 이번에 유전자를 채취한 4세 가량의 1번 무명 열사가 박군 혹은 이군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군은 5·18 당시 아버지와 외할머니, 삼촌과 함께 외출했다가 4명이 모두 행방불명됐다. 이군의 사연은 2년 전 5·18 38주년 기념식 당시 소개돼 알려진 바 있다. 5·18 당시 광주역 앞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군을 찾아 아버지는 38년간 전국의 유해발굴지를 찾아다녔다.
안종철 5·18 조사위 부위원장은 "민간 전문업체가 유전자 대조 검사를 실시한 후 12월 말 결과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다"며 "그 보고서를 전남대 법의학교실과 서울대 법의학교실에 검토를 맡겨 교차 검증을 통해 무명열사들이 행방불명된 광주 시민들인지 확인할 수 있다. 40년간 기다려 온 유가족의 품으로 무명열사들을 꼭 되돌려 드리겠다"고 밝혔다.
서충섭기자 zorba85@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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