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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보는 돌멩이도 빛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입력 2022.03.09. 20:14
장성서 전원생활 사진작가 윤흠주 커밀리아 스튜디오 대표

장성군 방장산 바로 아랫마을에 사는 사진작가 윤흠주(59·커밀리아 스튜디오 대표)씨는 늘 탈출을 꿈꾼다. 언제라도 일상이 지겹고 따분할 땐 특수 제작한 사륜구동 지프차로 어디론가 휭하니 떠난다. 산이든, 들판이든, 바다든, 호수든 간에 뭔가 끌림과 색다름이 있다면 며칠 밤이라도 그곳에 머무른다. 마음에 쏙 드는 사진 한 컷을 위해서다. 그렇다고 어느 유명 사진전에 출품하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발동은 아니다. 그저 비주얼 스토리텔링(Visual Storytelling)의 멋진 사진을 건지는 열정으로 행복을 이끌어내면 땡큐다. 지난해 10월 그는 드론을 조정할 수 있는 자격증도 획득했다. 새처럼 하늘세상에서 전해온 이미지는 어떤 진귀한 모습들을 선사하는지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윤흠주 사진작가

◆ 기다림의 미학… 생각 담는 예술

"수많은 사진을 촬영해도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그만큼 원하는 장면의 사진을 카메라 앵글에 포착하기란 다양한 시도와 오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가버릴 수도 있지만 최고의 한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의 기대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들 말합니다. 그 기다림은 괴로움이 아니라 희망이 있는 즐거움입니다.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도전하는 행복입니다. 기다림의 시간만 지나면 사진은 결국 빛으로 그린 그림이고, 생각을 담는 예술입니다."

마음속에 내재된 그의 사진에 대한 지설이다.

그는 "매번 보던 돌멩이라 할지라도 빛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달라지듯이 아주 익숙한 광경도 새롭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바로 빛"이라며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선 우선 어떻게 담아낼지 생각에 생각을 더해 피사체와 대화를 이끌어내고 소소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과의 인연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프랑스의 패션 헤어스타일 라이프스타일 여행잡지에서 브루노 카탈라노(Bruno Catalano)의 예술작품에 매료돼 자신이 손질한 헤어스타일을 사진으로 남겨보자는 데서 비롯됐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각종 미용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한창 헤어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터였다. 곧바로 '카메라 교본'이라는 책자를 구입해 독학으로 사진연구에 들어갔다. 이론공부를 위해 '흑백사진연구회'에도 가입했다. 사진을 익히는 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서라도 반드시 현장으로 출동하는 열정도 나타냈다.

지난 94년말부터 95년 중반 사이 서울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남산 외국인APT 폭파장면, 여의도 라이프빌딩 철거 모습,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의 역사적 현장에는 꼭 그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근거리에서 촬영하는 기지와 기개를 발휘했다.


◆ 성수대교 붕괴땐 기자로?…기록에 충실

"출근하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순간, 과천 집으로 빨리 돌아가 사진장비를 챙겨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사진장비를 메고 무조건 현장으로 달려갔어요. 사고 수습요원들과 UDT 대원들이 있는데 현장을 찍으려니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불쑥 '기자'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비싼 장비를 힐끗 쳐다보더니 빨리 저지선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요. 허겁지겁 UDT 대원의 고무보트를 타고 바로 근거리에서 셔터를 눌러댔어요."

성수대교 붕괴 현장

그는 지난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장면을 떠올리는 듯 박진감있게 얘기를 끌어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으로 말을 이어갔다.

"지난 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그날은 아버님의 위암 수술이 예정된 날이었어요. 수술은 뒷전인 채 사명감에 사로잡힌 듯 이미 몸과 마음은 붕괴사고 현장으로 내달리고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어디서 그런 절실함과 용기가 솟아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굵직한 사건의 현장체험은 그를 결국 사진을 전공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좀 더 체계적인 이론과 실제를 겸비해야겠다고 지난 95년 늦깎이로 광주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줄곧 인생의 전부가 사진인 양 사회의 어둡고 그늘진 현장만 줄기차게 쫓아다녔다.

성수대교 붕괴 현장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던진 아내의 한마디가 카메라 앵글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당신은 왜 그렇게 어두운 구석만 내리찍느냐고…" 둔기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자신을 돌아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만 할 것만 같은 마음속 상념의 잔재들일 뿐이었다. 그 한마디의 무게가 어쩌면 인생의 변곡점으로 작용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프리랜서로 밝은 이미지의 사진들로 채워나갔다.

우선 지인들의 소개로 인물 본위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명한 걸그룹의 음반 표지 사진은 물론 이효리와 백지영, 정애리, 미스코리아 윤혜경, 이하늬, 이슬기, 가스펠 가수 레나마리아, CCM 가수 소리엘 등등 수없이 많은 가수와 유명 배우들의 감각적이고 고혹적인 사진을 촬영했다. 지난 2003년 4월 PPK협회(Professional Photographer Korea) 주최 사진전에서는 최고상(상금 300만원)을 거머쥐기도 했다. 자연광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사진, 앵글이 자유로운 사진을 찍어야 남들과 다른, 느낌이 다른 사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성수대교 붕괴 현장

◆ 한땐 음악인… 생계로 헤어디자이너 길

사실 소싯적엔 사진보다 음악에 심취했다. 전주에서 익산으로 매일 편도 50분씩 버스로 통학하면서 익산 농림고에 입학했다. 유일하게 밴드부가 있는 고등학교였기 때문이다.

관악기인 트롬본을 만졌다. 키보드와 퍼스트 기타도 차례로 손을 댔다. 밴드부 친구들과 5인조 그룹사운드 '패러건(Paragon)'을 결성했다. 음악에 미쳐 전주 덕진공원 등지에서 연주했다. 1982년 졸업과 동시에 5인조 그룹은 대중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젊은 혈기에 멤버들 모두 상경했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그룹사운드 활동을 멋들어지게 하자는 계산에서였다. 낮에는 도봉구 수유리의 조그만 염색공장에서 직공으로 죽도록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음악학원에 다녔다. 회사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공부에 전념했고, 짬짬이 시간을 쪼개 멤버들과 호흡을 맞췄다. 12만원의 월급으로 학원비와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8만원은 전주에 있는 부모님에게 송금하기도 했다.

1년쯤 지났을까. 좋아하는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 서울의 음악세계 문턱이 높기도 했거니와 멤버들 모두 생활고에 찌들어 더 이상은 활동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었다. 그래도 서울 생활만큼은 중도하차 할 수는 없었다. 그간 흘린 땀과 눈물의 세월이 너무 아깝다고 느꼈다. 하루빨리 자격증이라도 따는 일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남성 헤어디자이너는 초창기인 시절인 지난 83년 종로의 한 미용학원으로 직행했다. 쪽방에 쪼그리고 앉아 창문에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으로 진저리나도록 머리 손질을 연습했다. 노력의 결과였을까. 학원 원장님이 한동안 보조강사로 일할 수 있게 했고, 일자리를 얻는 행운을 안았다. 지금의 구리시에 있는 한 미용실이었다.

성북구 돈암동에서 출퇴근을 하며 미용실 원장이 시키는 대로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보충역으로 군대를 제대할 무렵, 우연히 86 아시안게임 선수촌 헤어숍에서 헤어디자이너를 뽑는다는 광고를 접했다. 무턱대고 주관사 담당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시대 흐름에 발맞춰 이제 남성 헤어디자이너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원이라는 사실을 논변하면서….

성수대교 붕괴 현장

◆전원생활 실현… 자연 닮은 스튜디오 소망

구애작전이 성공했던지 그는 헤어디자이너로 발탁됐다. 그곳에서 미용중앙회 회장 등 내로라하는 헤어디자이너들을 만나게 됐다. 88 서울올림픽 때에도 역시 선수촌 헤어디자이너로 선발됐다. 그런 인연으로 헤어기능올림픽에서 선수들 훈련코치로, 일본의 헤어숍 시장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도 잡았다. 미용중앙회 주최 '이브닝스타일의 파티머리'에서의 금상, 지난 91년 세계미용대회에서 금상 등 미용업계에서 괄목할 만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 즈음 워커힐 헤어쇼 무대 뒤에서 운명처럼 동종업계의 아내 김양희(54)씨도 만났다. 그는 이미 미용업계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지난 92년 4월 김씨와 결혼에 골인한 그는 연고지가 아닌 과천과 남원, 군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헤어숍을 오픈했다. 특히 남원에서는 시내 한복판에 흉물스럽게 방치됐던 폐가옥을 완전히 리모델링하는 하우스 스튜디오를 만들어 남원시로부터 올해의 건축물상까지 받는 열정을 쏟기도 했다.

지난 2010년부터 광주 상무지구와 양산동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직원 50여명을 거느리는 회사 대표로 성장했다. 2013년에는 평소 그리던 전원생활의 꿈도 실현했다. 장성 북이면 3천500여평의 너른 대지에 텃밭을 일구고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근엔 목공예에도 재미를 붙였다. 그리고 가끔씩 젊은 날의 못다 이룬 꿈의 향기를 좇아 알토 색소폰과 재즈 하모니카의 멋들어진 연주도 하곤 한다.

그는 자신의 터에 누구나 한 번쯤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인 커피숍과 자연을 닮은 스튜디오, 그리고 목공 작업실과 체험실을 조속히 마련하는 게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소망이라면서 크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봉일기자 amazingreporter@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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