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판결문으로 본 광주·전남 의병

흩어졌다가도 일시에 수백 대군··· 연합전술 혁혁한 공 세웠다

입력 2022.05.26. 19:03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② '연합의진(聯合義陳)' 지향
심남일의병장동상(함평)

[판결문 속 한말 호남 의병] ② '연합의진(聯合義陳)' 지향

“1909년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례 없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호남 의병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로 내부적 통일을 꾀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존 연구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면 세계 최강 러시아를 꺾은 일본군과 불퇴전의 전투를 전남 의병이 24개월 넘게 치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의병부대를 조직·운영하려면 병사들이 먹을 식량, 전투에 쓸 무기 구입 등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따라서 아무리 재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한꺼번에 수백 명의 의병을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의병부대 조직이 소규모로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사정을 의병부대를 추적한 일본군 몽탄 수비대의 정보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치홍 판결문

"적괴 박민홍 및 박사화(원래 심남일의 부하였는데 현재 독립해 부하 40~50명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영산포, 영암의 중간에 있는 지구(地區)를 배회하는데 항상 삼삼오오 흩어져 있다가 모일 때는 100명 이상의 세력을 이루었다" -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

국사봉을 중심으로 활동한 호남의소(湖南義所)의 주축을 이룬 박민홍, 박사화 등이 독립부대를 거느리고 있고, 규모가 40~50명인데, 평소에는 삼삼오오 움직이다가 유사시에 100명 넘게 모여 세력을 형성함을 알 수 있다. 소규모로 편성됐던 여러 의병부대가 유사시에 하나로 합하고 있다. 곧 '독립된 의진(義陳)'이 서로 연합해 '합진(合陳)'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영암을 빛낸 의병 김치홍의 판결문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

"피고(김치홍 이하 같음)는 폭도 수괴 심남일이 총기 50자루를 휴대한 폭도 6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8년 10월 2일 그의 부하로 가입하여 그의 지휘를 받아 영암군 및 능주를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민홍이 총기 15자를 휴대한 폭도 3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9년 1월 11일 그의 부하가 되어 제1초십장이 뒤어 나주군을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사화가 총기 12자루를 휴대한 폭도 약 26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그의 부하가 되어 제1초십장이 되어 영암을 휘젓고 다녔다" -명치 43년(1910년) 형구 제108호

김치홍은 심남일 부대의 기군장이었는데, 박사화 부대의 제1 초십장, 박민홍 부대의 제1 초십장을 했다고 나와 있다. 곧 김치홍이 심남일·박사화·박민홍 의병부대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중요한 직책을 수행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독립의진을 형성한 의병부대들이 합진을 자유롭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독립 의진을 형성했을 때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으나 유사시에는 합진함으로써 대규모 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규모에서 크게 밀린 일본군은 우리 의병부대와 전투하는데 쩔쩔맸다. 이들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구체적인 전투상황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소관(일본군)은 일·한 순사·헌병 합동의 한 부대를 인솔하여 정오 남평군 죽곡면 선동에 도착한 바, 수괴 박사화·박민홍·강무경이 인솔하는 약 250명의 폭도가 선동 배후의 덕룡산이라고 칭하는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사격을 가하였으나 적은 천험의 지리와 다수를 믿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교전한 지 3시간 후 드디어 남쪽 영암군 방면으로 궤란시켰다. 전날(25일) 적과 충돌한 덕룡산에는 폭도가 아직 진지를 구축, 집단의 모양이 있음에 의하여 소관은 26일 (일본) 순사 10명, 한(韓) 순사 5명을 인솔하고 나주 헌병소 근무 상등병 3명·보조원 2명과 함께 토벌을 위하여 급히 덕룡산과 약 1㎞ 떨어진 구릉에 이르렀을 때 덕룡산 정상에서 우리 부대를 향하여 빈번히 발포하고 또 때로는 대포를 발사하여 완강히 저항하므로 산개하였다" -나경비발212호

덕룡산에서 의병들이 포대를 설치해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덕룡산은 남평, 영암, 강진에 걸쳐 있는 요충지인 이곳에 의병들이 포대를 설치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이다.

일본군 진중일지에도 의병이 일본군에서 대포를 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위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심남일 부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합진을 꾸려 일본군에 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이때의 전투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년 2월 26일 박사화, 박민홍 의병 연합부대는 25명의 일본 토벌대 및 나주경찰대와 영산포 근처 철천에서 무려 3시간 교전하다 영암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이들 부대를 일본군은 영암수비대 11명, 해남 수비대 17명 등 28명을 동원해 포위 공격했고, 이튿날인 2월 27일 영암수비대 11명이 박민홍 의병부대를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해남수비대까지 동원하는 등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박민홍의 아우 박여홍 등 20명의 의병이 장렬한 전사를 했다.

무려 3일간 일본군과 유격전이 아닌 전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심남일 일기'에도 이 무렵의 전투과정에서 이루어진 분진과 합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하여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은 즉, 여러 개의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략)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 이대극, 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하였다" -남평 거성동 접전

심남일 일기는 당시 의병들의 전투상황일지로, 때로는 약간의 성과를 과장해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별도로 전투일지를 기록하는 '서기'를 둔 점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 내용을 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남평 거성동 전투에 독립 의병부대들이 총집결해 연합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영광 법성포 주재소를 의병부대가 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부대 등 호남창의회맹소에 속한 독립의병들이 연합 작전을 펼친 것도 이러한 분진과 합진의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의병부대가 독립부대를 곧 분진을 유지하다가 유사시에 '연합'으로 합진을 구성한 것은 부대 운영의 효율성과 함께 유사시 피해 부대의 복구를 신속히 하려는 의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8월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8월 폭도세력 비교표'를 보면 심남일 부대원 숫자가 전월 '200명', 본월 '200명' 차이가 없다,

전월에 일본군과 2차례, 본월에 1차례 등 총 3차례나 전투를 해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총원의 변동이 없다는 것은 의병부대의 결원이 곧 보충됐음을 말해준다.

'분진'과 '연합'을 통한 '합진'의 구성은 강한 전투력을 형성해 일본군과 비정규전이 아닌 전면적인 전투를 전남 곳곳에서 24개월 동안 380회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연합작전'의 귀재로 빛나는 전공을 세운 김치홍은, 전투 중 불행히도 피체되어 1910년 6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 대구공소원에서 다음 달인 7월 23일 항소 기각됐다. 그는 형장에서 순국했다. 1990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영암군에서는 그의 고향 시종면에 2010년 '의홍사'라는 사당을 지어 공적을 기리고 있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댓글0
0/300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