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어린왕자' 공연평] 발레·미디어아트로 살아난 매혹적 여정

입력 2021.10.20. 16:40
석양과 장미를 다시 음미하다
조가영 안무·진시영 미디어아트

허명진(무용평론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 거리는 코로나19 이후로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거리 두기를 늘 의식하다 보니 오히려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나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할지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행성 B612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석양을 바라보면서 홀로 살아가던 어린왕자에게 그러한 계기는 우연히 그의 행성에서 자라난 장미를 통해서 주어졌을 것이다. 조가영 안무의 발레 작품 '어린왕자'(8월 29일, 광산문화예술회관 공연)는 이러한 석양에서 장미로 이어지는 모티브로부터, 미디어아트와의 결합을 통해 어린왕자의 낯설고도 매혹적인 여정을 펼쳐낸다.

이 발레에서 어린왕자와 만나는 '나'는 내레이션을 통해 등장하여, 생떽쥐페리 원작의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내용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원작에 등장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나 화산과 장미가 있는 소행성의 삽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살아나며, 어린왕자가 여행하는 우주공간과 행성들의 풍경은 미디어아트를 통해 구현된다. 이처럼 원작의 여백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치된 여러 가지 장치들로 인해, 동화이지만 동화 같지 않은 깊이를 지닌 원작을 다시 한번 들춰보고 싶게 만드는가 하면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엇보다도 원작에서 나타나듯 천진하면서도 까다로운 장미의 화려한 개화 장면을 위해 시도한 폴댄스와의 결합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안무 선택의 폭을 확장하면서도 기존의 발레적 요소들 또한 다양하게 도입하고 있다. 발레 특유의 마임과 결합하여 장면마다의 독해를 쉽게 하기 위한 장치를 빼놓지 않는가 하면, 숫자의 춤에서처럼 행성을 표시하는 원형무대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발레의 형식미가 강조된 안무라든지, 여우와의 만남으로부터 관계 맺기의 어려움과 길들임의 메시지를 되새기듯 고전적 파트너십이 중심이 된 안무도 찾아볼 수 있다. 뱀에 물려 '별이 된 어린왕자'의 춤은 전구가 반짝거리는 망토와 롤러블레이드에 얹어져 미래적이고 우주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이렇듯 안무뿐 아니라 미디어, 기계장치 등 발레와 다채롭게 접속하는 융·복합적 시도를 통해 표현 영역을 넓히면서도,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 단위의 관객을 대상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 작품이다. 익살스러운 마임과 여우나 뱀 등 주요 캐릭터의 형상화뿐 아니라 춤을 즐길 수 있도록 발레 팬을 배려한 점도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석양과 장미의 장면만으로도 '어린왕자'를 무대화하는 한 시도로서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개막 전 작품을 소개하는 안무자가 인용한 원작에서의 문구처럼 이 발레가 관객의 마음을 얻었는지 일일이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음을 열게 할 만한 작품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어때요?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3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

문화일반 주요뉴스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