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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시각] 사실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

@서충섭 입력 2020.01.17. 16:02

사회부 차장대우

최근 한 동료에게서 질책을 들었다. 과거에 쓴 기사가 평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한화 김성훈 선수가 광주 한 병원 옥상에서 추락해 운명을 달리했을 때 쓴 기사였다.

상사의 지시로 짧은 사건 기사를 작성하면서 필자는 “술이 많이 된 것으로 보인다”던 경찰 관계자와의 취재를 바탕으로 ‘경찰은 김성훈이 술을 마시고 9층 옥상에서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썼다.

경찰이 이같은 판단을 내놓은 데에는 CCTV에 찍힌 그의 비틀거리는 모습, 그리고 술에 취한 모습을 본 간호사의 증언이 뒷받침됐다. 더 행적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유족들의 만류가 있었다고 했고 나 역시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경찰의 일은 범죄 연관성 여부만 확인하면 그만이다.

다른 기자에게서도 들어본 적 있다. ‘술’이야기를 쓴 건 내가 처음이었던 모양이고, 고인에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KIA에서 나를 좋지 않게 본다는 것이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던 차에 서두에 언급한 동료가 칼럼을 통해 ‘단순히 술 먹고 죽었다고 단정 지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만감이 교차할 수 밖에 없다. 스포츠전문매체 기자도 아닌 터라 평소 일반 사망 사건과 동일한 시각으로 접근해 기사를 작성했다.

동료와 KIA 구단의 섭섭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일반인과 달리 유명인의 뉴스는 본인이 원치 않는 사실이 영원히 기록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사실이라고 해서 출처 자체를 막연히 의심하는 건 지혜롭지 못하다.

기자가 전하는 것은 결코 왜(WHY)가 아니다. 사건이 어떻게(HOW) 발생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독자들과 공유해 판단을 돕는다. 왜(WHY)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물음이다. 부단한 노고 끝에 기사를 작성해 나름의 ‘왜’를 제시해도 물음은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기사는 그래서 미완성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따금씩 우리는 마음이 가는 곳에 따라 이 사실을 부인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부정이 드러나면 이를 보도한 기자와 매체가 공격을 받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동료의 고민도 이해는 간다. 야구 선수들과의 오랜 기간 교류를 해 온 그가 느끼는 감정은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건기자인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술을 먹고’라는 문구가 가져올 부정적인 효과를 우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을 전달한 이의 잘못이 돼서는 안된다. 타인의 비극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이다.

어떻게(HOW)와 왜(WHY)는 구분하길 권한다. ‘술을 먹고’는 결국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나’를 설명해주는 부연적인 문구다. 이는 고독사가 ‘고독해서 죽었다’(WHY)는 뜻이 아니라 ‘돌봄 없이 고독하게 죽어갔다’(HOW)는 것과 같다.

기자는 판단하는 이가 아니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독자들의 판단을 도울 수 있는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기사가 끼칠 영향을 쓰기도 전에 고려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도가 반영된 기사가 아닐까. 중첩된 사실 속에서 진실이 드러난다지만 그 과정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드러난 진실을 납득하기까지는 다시 긴 시간이 걸린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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